'맥심'으로 알려진 국내 1위 커피업체 동서식품은 지난해 1150억원의 당기순이익을 올렸다. 이 중 96%인 1100억원을 회사의 주주인 동서와 미국 크래프트가 배당으로 절반씩 가져갔다. 2008년의 경우 그해 회사가 번 돈(당기순이익 1409억원)보다 많은 돈(1746억원)을 배당했다. 연구개발 등 투자 자금으로 쓰이는 사내유보금을 헐었다. 동서식품에 따르면 이 회사의 매출액 대비 연구비는 0.7% 수준이다.
대형 식품업체들이 국내 시장에서 조(兆) 단위 매출을 올리고 정작 연구개발에는 인색한 것으로 나타났다. 동서식품처럼 '배당잔치'를 벌이기도 하고 그룹의 캐시카우(cash cow·현금 창출력이 있는 회사)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다. 자동차·전자 회사들이 연구개발에 매달려 글로벌 시장에서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는 것과 달리 식품 기업들은 손쉽게 돈 벌 수 있는 내수 시장에서 안주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일본 기업에 뒤처진 한국 식품공룡
국내 1위 음료회사 롯데칠성음료의 목표는 '2018년 매출 7조원의 세계적 종합음료회사'가 되는 것이다. 이 회사 매출은 최근 5년간 연평균 9%씩 성장하고 있지만 '세계적 회사'가 되는 데는 시간이 좀 더 걸릴 전망이다. 작년 전체 매출 가운데 해외에서 벌어들인 비중이 4.5%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CJ제일제당이 6%, 라면생산 1위업체 농심 6.9%, 제과 1위인 롯데제과는 5.3%였다. 장(醬)류를 많이 수출한 대상이 12.5%로 상대적으로 높았지만 오뚜기(5.4%), 매일유업(2%), 남양유업(1.4%)도 5%대 이하였다.
선진국 업체들은 다르다. 세계 최대 식품업체 네슬레는 작년 매출의 82%를 유럽 이외 시장에서 올렸다. 유제품이 주력인 프랑스 다농의 경우도 유럽 외 매출 비중이 44%였다.
해외 진출에 보수적이라고 평가받는 일본 기업들도 국내 기업보다는 앞서 있다. 세계 최초로 조미료를 개발한 식품 기업 아지노모토의 해외 매출 비중은 지난해 34%였다. 야쿠르트혼샤(25%), 닛신식품(14%) 등도 해외 매출 비중에서 국내 기업을 앞선다.
식품업계 관계자는 "한국 식품회사는 대부분 창업 초기 일본 업체들로부터 기술을 도입했다"며 "똑같이 일본에서 기술을 배워 온 전자·반도체가 세계시장에서 일본을 제치는 동안 식품회사는 편한 안방 장사로 돈을 벌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중앙대 이정희 교수(산업경제학)는 "1980년대 후반 가공식품 시장이 개방됐을 때 국내 식품업체들은 해외 진출이 아니라 외국 브랜드의 국내 진출을 막는 데에만 급급했고 지금도 이런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며 "식품 기업들이 국내 시장에 의존하다 보니 지금처럼 제품 고급화나 가격 인상에 기댈 수밖에 없고 이마저도 10년 후 고령화와 인구 정체로 시장 규모가 줄게 되면 기업 존립의 위기까지 맞을 수 있다"고 말했다.
◇매출 1%도 안 되는 연구개발비
이렇게 번 돈을 어디에 쓰는가도 문제다. 빙그레는 지난해 399억원을 벌어 이 중 106억원을 현금으로 배당(26.6%)했다. 2010년에도 24.9%를 배당했다. 유가증권 상장사 평균(15%)보다 높은 수치다. 업체 가운데는 번 돈으로 와인 수입, 외국 외식 체인 도입 등에 쓰는 경우도 다수다.
식품기업들은 제품 가격을 올릴 때마다 원자재 가격 상승을 이유로 든다. 하지만 식품업체들의 연구개발비가 제조업 평균에 못 미치고, 이 때문에 기술 개발을 통해 가격을 낮추려는 노력이 부족하다는 비판이 끊임없이 나온다.
오리온은 지난해 연구개발비로 20억원을 썼고(매출액의 0.3%), 롯데칠성음료는 38억원(0.25%)을 썼다. 지난해 두 회사의 영업이익은 각각 2100억원, 1650억원이었다. 크라운제과(0.4%), 해태제과(0.3%), 롯데삼강(0.56%) 등도 연구개발비가 매출액의 1%에 못 미쳤다.
지난해 공정거래위원회가 한국개발연구원(KDI)에 의뢰해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1~3개 업체가 시장을 독과점한 전분·당류, 커피, 식초·발효·화학조미료 제조업의 경우 매출액에서 연구개발비가 차지하는 비율(2005~2009년)이 평균 0.97%를 기록해 국내 제조업 평균(2.4%)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국내 식품업체들이 안방에서 쉽게 장사하면서 해외에서는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비판도 나온다. 롯데칠성음료가 중국에 세운 롯데화방(華邦)음료, 롯데오더리(澳的利)음료의 경우 지난 5년간 적자를 냈으며 올해 상반기는 43억원의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식품기업들이 안주하는 사이 한국 제조업 국내총생산(GDP)에서 식품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2001년 18%에서 작년 11%대로 쪼그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