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주택담보대출의 대부분은 시중 금리에 따라 대출 금리가 바뀌는 변동금리 대출이다. 6월 현재 전체 주택담보대출의 86%에 이른다.

금융 당국이 2000년대 중반부터 계속 장기 고정금리 대출을 유도하고 있지만 먹히지 않았다. 변동금리 대출은 금리 상승기 때 추가 이자 부담을 고스란히 대출자가 감당해야 하므로 위험하다는 경고도 무용지물이었다. 당장 변동금리 대출 이자가 고정금리에 비해 싸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올 들어 이런 트렌드가 급변하고 있다. 신규 대출자의 절반가량이 고정금리 대출 상품을 선택하고 있다. 도대체 무엇이 이런 마법을 부린 걸까.

◇'적격 대출'이 마법의 주인공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정부 기관이 보증해서 고정금리 대출의 이자를 변동금리 이하로 낮췄기 때문이다. 은행이 20년 가까이 고정금리에 묶이는 리스크를 정부 기관에서 대신 떠맡아준 것이다.

마법의 주인공은 지난 3월 첫선을 보인 이른바 '적격(適格) 대출'이란 이름의 상품이다. 대출 상품 이름치곤 좀 이상한데 '규격화된 대출'이란 의미다.

9개 시중은행에서 취급하는 이 대출은 9억원 이하 주택을 담보로 최고 5억원까지 고정금리, 원리금 균등 분할 상환, 만기 10~35년 조건으로 받을 수 있다. 은행들은 이 대출을 계속 유지하는 게 아니라 정부 출자기관인 주택금융공사에 넘긴다. 대신 일정한 수수료를 받는다. 주택금융공사는 이 대출 자산을 담보물로 삼아 주택저당증권(MBS)을 발행해서 시장에서 매각해 대출 재원을 다시 조달한다. 따지고 보면 정부가 주택담보대출의 재원을 조달하고, 은행들은 대출을 대행만 하는 것이다.

정부 신용으로 채권을 발행해 돈을 모으니 은행보다는 싼값에 돈을 조달할 수 있고, 덩달아 대출 금리가 낮을 수밖에 없다. 올해 상반기 적격대출의 평균 금리는 연 4.7%. 대부분이 변동금리 대출인 기존 은행권 주택담보대출 금리 5.1%보다 0.4%포인트 낮다.

1억원을 적격대출로 빌리면 연간 이자가 40만원 더 싼 셈이다. 금리가 낮다 보니 손님이 모일 수밖에 없다. 적격대출은 출시 첫 달 1259억원이 나갔는데, 9월 한 달 동안엔 2조1336억원이 나갔다. 9월까지의 총 대출액도 7조6216억원으로 커졌다. 국민은행의 경우 9월 한 달간 신규로 나간 주택담보대출 중 48%가 적격대출이었다.

변동금리 대출에서 옮겨 타는 사람들 많아

은행 입장에서는 직접 대출해서 예대 마진을 챙기는 것에 비해 수수료 수입이 적지만, 리스크를 정부가 떠안아 연체 걱정을 덜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 판매에 열을 올리고 있다. 금융당국의 방침에 따라 2016년까지 고정금리 대출 비율을 전체 대출의 30%까지 끌어올려야 하는 것도 은행이 이 대출을 늘리는 이유로 작용하고 있다.

주택금융공사에 따르면 적격대출을 받는 사람 중 65%가 기존 대출을 갈아타는 용도로 쓰고 있다. 회사원 김영화(45)씨는 2006년 CD(양도성예금증서) 금리에 1.6%포인트를 얹은 변동금리로 1억5000만원을 대출받아 강북에 아파트를 장만했는데 지난 7월 적격대출로 갈아탔다. 연 5.1%였던 금리가 4.5%로 낮아졌다. 월 이자 부담이 7만원 정도 줄었다. 김씨는 "이사할 생각이 없어 20년에 갚으려고 대출을 바꿨다"고 말했다.

주택금융공사는 평균 2억4500만원짜리 집을 담보로 9900만원 대출을 받아, 평균 19.5년 장기로 나눠 빚을 갚으려는 실소유자 중심의 대출이 이뤄지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금융권에선 주택금융공사가 이 상품을 얼마나 많이 공급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현재는 정부가 연 1200억~1300억원씩 주택금융공사에 출자해 MBS에 대한 지급 보증 재원으로 쓰고 있다.

금융권 관계자는 "은행들이 리스크가 없는 만큼 대출 심사를 허술하게 할 가능성이 있고, MBS에 대한 지급보증을 정부가 하기 때문에 대출 부실을 결국 정부가 떠안아야 한다는 점은 위험요소"라고 지적했다.

☞적격대출(conforming loan)

9억원 이하 주택을 담보로 최고 5억원까지 고정금리, 원리금 균등 분할 상환, 만기 10~35년 조건으로 대출받을 수 있는 상품. 주택금융공사는 이 대출 자산을 담보물로 삼아 주택저당증권(MBS)을 발행한다. 주택금융공사가 요구하는 규격대로 은행들이 상품구조를 짠다는 의미에서 '적격'이라는 이름이 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