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만에 찾아온 최악의 가뭄 등으로 인해 세계 최대 곡물 생산국인 미국에서 농작물 가격이 수직 상승하고 있다. 쌀을 제외한 주요 곡물 자급률이 0%에 가까운 우리나라로서는 곡물 가격이 상승하면 직격탄을 맞을 수밖에 없다. 국내 전체 곡물 자급률도 27%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평균 자급률(110%)을 한참 밑도는 최하위 수준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세계적인 곡물가 상승에 어떤 대비를 하고 있고, 무엇을 해야 할까.
◇식량 무기화 시대 준비 덜 된 한국
서울 중구 CJ제일제당 본사 6층 곡물구매전략실 직원들은 요즘 날마다 돌아가면서 새벽 5시까지 당직을 선다. 지난달 26일 곡물구매전략실 직원들은 대형 모니터를 통해 실시간으로 국제 곡물거래 정보와 관련 외신 기사를 살펴보고 있었다.
올 7월 미국 옥수수, 콩, 밀 같은 주요 곡물 가격이 최대 50%까지 껑충 뛰어오르자 미국으로부터 원자재를 수입하는 CJ도 재료값 상승 부담이 커졌다. 수확기를 맞이한 현재는 공급량이 늘면서 다소 주춤하지만 추수가 끝나면 또 언제 가격 상승에 발동이 걸릴지 모른다.
송정호 부장은 "국제 곡물 가격은 약 4개월 시차를 두고 국내 식품 가격에 영향을 미치는데 지난 7월부터 미국 곡물 가격이 치솟았으니 올해 11월 무렵부터는 국내 식품업계들이 원자재값 상승으로 인한 가격 압박을 받게 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CJ나 삼양사 등 해외에서 곡물을 다량 구입해야 하는 일부 식품 기업은 자체적으로 국제 곡물거래가를 분석해서 가격이 안정적일 때 물량을 미리 비축해둔다. 재료값 폭등으로 인한 기업의 이윤 감소를 막기 위해서다. 개별 기업이 원자재값 폭등으로 인한 압박이 줄면 불필요한 제품가 상승을 막아 결과적으로 소비자들에게도 혜택이 돌아올 수 있다.
하지만 개별 기업으로는 협상력이 부족하므로 정부 차원에서 한국형 곡물 메이저를 육성해 가격 협상력을 갖추는 등 더 적극적인 대책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식량 무기화(武器化) 시대, 해외 경작 등 적극적 대처 필요
지난달 21일 시카고 도심에서 남쪽으로 약 30㎞를 차로 달리자 네덜란드계 세계적 곡물 메이저 니데라(Nidera)의 곡물 엘리베이터가 나타났다. '곡물 엘리베이터'란 생산자로부터 곡물을 매집한 뒤 건조·저장·분류·운송하는 인프라다.
케빈 그루덤(Grudem) 매니저는 인근 일리노이강과 철도를 가리키며 "바지선(단거리 화물 수송선)과 수송 열차를 통해 전국 각지에서 수확된 농작물이 이곳으로 집결된다"고 말했다. 이렇게 모인 곡물은 작물별로 적정 수준 온도와 습도가 맞춰진 저장 창고에 보관된다. 곡물 거래에 필요한 모든 인프라가 갖춰져 있어 운송, 보관이 쉽고 따라서 구매력과 거래 관련 정보 접근성도 커진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농수산식품유통공사(aT)도 삼성물산·한진 등과 함께 컨소시엄을 구성해 작년 미국에 곡물 회사 aT그레인컴퍼니(AGC)를 설립했다. 직접 곡물 회사를 만들어 해외 의존도를 낮추고 장기적으론 해외에서 안정적으로 곡물을 도입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자는 계획에서다. 하지만 아직 큰 진척은 없다. 구매력을 키우려면 일단 인프라인 곡물 엘리베이터부터 갖춰야 하지만 아직 그 기본 단계도 밟지 못한 상황이다.
곡물 자급률이 26%로 우리와 비슷한 일본의 경우 이미 1978년 곡물 회사 '젠노(全農)그레인'을 설립, 미국에 대형 저장·유통 시설을 확보하고 글로벌 조달 시스템을 구축했다. 현재 수입량(2700만t)의 70%를 자국 조달 시스템을 통해 공급받고 있다.
전문가들은 또 브라질, 우크라이나 등 곡창 지역에 우리 기업이 각종 인프라를 건설해주고 대신 그곳에서 경작해 농작물을 확보하는 식의 해외 협력도 대비책이 될 수 있다고 조언한다. 곡물 거래사 '뉴에지(New Edge)'의 애널리스트 댄 세컨드(Cekander)는 "일본의 미쓰이(三井)물산은 브라질에 약 10만㏊ 규모의 농장을 매입해 운영하고 그곳에서 올리는 매출만 10억달러에 육박한다"며 "식량 자급률이 낮은 한국도 해외에 농업 기지를 건설하는 것이 세계 곡물가 상승 여파를 대비하는 해법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곡물 엘리베이터(grain elevator)
밀이나 콩 등 곡물을 집하·건조·선별·저장하는 시설. 주로 강이나 철도 등 운송 시설 인근에 있고, 각지에서 운반된 곡물을 창고 엘리베이터가 실어서 각 층 저장고로 이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