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말 롯데백화점은 단골손님 1만2000명을 불러 특별 할인 행사를 열었다.
등산복이나 여성복을 꾸준히 많이 사갔던 고객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그동안 애용해 주신 고객님께 감사드리는 뜻에서 마련한 자리"라며 초청했다. 할인 폭도 단골 대접을 톡톡히 했다. 어지간해서는 할인을 안 하는 신상품은 10%, 다른 상품들은 20~30%씩 값을 깎아줬다. 덤도 얹어줬다. 매장 직원들이 고객들을 백화점 식당가로 데려가 밥을 사고 추가 할인 쿠폰도 건넸다.
롯데백화점이 이런 행사를 점포별로 진행한 일은 전에도 있었지만, 전국 31개 점포를 한꺼번에 동원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롯데 관계자는 "3대 백화점(롯데·현대·신세계) 매출이 3개월 연속 줄어들 정도로 불황이 깊어져서 충성도 높은 단골 고객들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경기 침체가 장기화되고 소비가 얼어붙자 기업들이 '집토끼 지키기' 전략을 강화하고 있다. 막대한 마케팅 비용을 쓰면서 새 고객을 확보하는 '산토끼 잡아오기' 전략을 구사할 만한 여력이 없는 데다, 그동안 잘 키워놓은 집토끼 고객마저 경쟁사에 빼앗기면 큰일이라는 위기의식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애프터 서비스로 집토끼 지키자"
교보생명은 보험에 이미 가입한 고객을 설계사가 다시 찾아가 그동안 사고당한 일은 없는지, 마땅히 받았어야 할 보험금을 놓치지는 않았는지 챙겨주는 '평생 든든 서비스'를 대대적으로 펼치고 있다. 보험에 가입할 때는 고객을 왕(王)처럼 모시다가 그 뒤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불만을 수용한 것이다. 지난 1년 동안 전체 개인고객(345만명)의 절반에게 찾아갔고, 이 중 2만명에게는 못 받았던 보험금 105억원을 되찾아줬다.
삼성카드 최치훈 사장은 지난 8월 장기·우수 회원 5만명 앞으로 CEO 레터를 보냈다. "10년 이상 한결같이 함께해 주신 회원님께. 이제부터는 보유하신 포인트를 소멸 걱정 없이 계속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보통 5년이 지나면 없어지는 포인트를 무기한 사용할 수 있는 특별 혜택을 단골손님, 큰손 고객에게만 준다는 것이다.
SK텔레콤도 VIP 고객에 대한 멤버십 혜택을 크게 강화했다. 15년 이상 고객에게는 최대 42만원짜리 '감사 바우처(상품·서비스 구매권)'를 보내주고 있다. 무료 통화, 차량 정비, 인터넷 쇼핑몰 할인권 등이 들어 있다. 20년 넘은 고객에게는 꽃바구니에 고급 와인, 콘서트 초대장을 보내준다.
보스턴컨설팅그룹 한국사무소의 김연희 시니어파트너는 이런 사례들을 "불황기에 집토끼 고객들을 붙잡아 매출을 지키는 '인-포스 북(in-force book·기존 고객)' 유지 기법의 일종"이라고 설명했다. 호황 때는 가격이 조금 비싸거나 서비스가 다소 떨어져도 참던 고객들이 불황이 닥치면 조금이라도 혜택이 좋은 경쟁사로 옮겨갈 확률이 훨씬 높아지기 때문에 나오는 전략이라는 설명이다.
또 다른 컨설팅 기업 베인앤컴퍼니의 분석에 따르면, 기존 고객을 상대로 충성도를 더 높이는 '로열티 마케팅(loyalty marketing)'을 시도한 기업들은 하지 않은 기업들보다 전체 마케팅 비용은 평균 15% 적게 쓰면서 매출 성장률은 2배 이상 높다.
◇"불황 때 챙긴 집토끼, 호황 때 큰 힘 된다"
기업들의 집토끼 지키기 전략에는 언젠가 다시 돌아올 호황에 대비하자는 뜻도 담겨 있다. 베인앤컴퍼니 정지택 파트너는 "불황기 때 집토끼 고객들의 만족도를 높여주면 호황기 때 이들이 거래 규모를 더 키워주는 식으로 보답하기 때문에 기업의 미래 성장 동력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최근 KB국민은행은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에 '30~40대 직장인용 특화 점포'를 연 것도 이런 전략의 일환이다. 이 점포는 업무 시간 중 은행 지점을 찾기 힘든 직장인 고객을 위해 저녁 7시까지 영업하고, 개인 자산관리를 도와주는 'PB 상담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다. KB 관계자는 "젊은 직장인들은 앞으로 승진을 하면서 예적금을 늘리거나 결혼과 내집 마련을 위해 대출을 받아갈 사람들이라서 미리 붙잡아둬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집토끼 전략이 적중하려면 소비자들이 브랜드에 대해 정서적 소속감을 갖도록 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아이폰, 할리데이비슨처럼 마니아 고객들이 해당 제품에 대한 긍정적 감정을 자발적으로 퍼뜨릴 정도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홍성태 한양대 교수는 "제품이나 서비스를 체험하며 느낀 긍정적 감정이 인터넷을 통해 전파되면 파급 효과는 폭발적"이라며 "집토끼 고객을 잘 키우면 이같은 파급 효과의 진원지가 되는 '알파 소비자(alpha consumer)'로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