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패션·유통 기업들이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선진 패션 브랜드 인수에 본격적으로 나서고 있다. 대기업들뿐 아니라 중소 패션·유통업체까지 이 흐름에 가세했고, 해외 브랜드의 국내 영업권이나 라이선스권을 따내던 것에서 나아가 아예 브랜드 본사를 사들이는 사례도 속출하고 있다.
특히 유럽 재정위기로 인한 불황 때문에 싼값에 매물로 나온 유럽 패션업체들이 적지 않아, 글로벌시장 진출을 모색하는 국내 패션 기업들에게는 '큰 장'이 열린 셈이다. 패션업계 전문가들은 "유럽 패션기업 본사 입장에서는 해외 기업의 안정된 자금력으로 브랜드의 명맥을 이을 수 있고, 한국 기업은 유럽의 고급 브랜드를 품에 안아 기업의 영향력을 높이는 기회로 활용할 수 있는 윈윈(win-win) 전략"이라고 말한다.
◇유럽 패션·명품 업계에서 큰손으로 떠오른 한국
의류유통 중소기업 앤플러스21은 최근 이탈리아 가방 브랜드 시크릿 폼폼을 250만 유로(37억원)에 인수했다. 그동안 라이선스 영업을 하다가 아예 본사를 사들인 것이다. 국내 중견 패션 기업 EXR도 지난해 9월 프랑스 디자이너 브랜드 카스텔 바작을 120억원에 인수했다. 패션업계에서 이들 기업의 사례가 화제가 된 것은 대기업이 아닌 중소기업이 해외 유명 브랜드를 인수했기 때문이다.
국내 대기업들의 해외 브랜드 인수는 이미 지난해부터 본격화됐다. 이랜드가 지난해 7월 이탈리아 가방 전문 브랜드 만다리나 덕을 인수했으며, 제일모직은 11월 이탈리아 고급 악어가죽 브랜드인 콜롬보 비아 델라 스피가를 인수해 세계 명품업계에서 큰 화제가 됐다.
LG패션도 최근 이탈리아 남성복 브랜드 인수 작업을 완료하고 현지 지사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코오롱인더스트리 FnC부문은 유럽의 남성·스포츠복 인수 대상을 물색 중이어서 앞으로 해외 패션 브랜드 M&A는 더 늘어날 전망이다.
◇신흥 시장 진출을 위한 브랜드력 강화 전략
국내 기업들이 잇따라 해외 브랜드를 인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자금난에 휩싸인 유럽 브랜드를 인수하기에 최적기이기 때문이다. 글로벌 금융위기에서 완전히 탈출하기도 전에 닥친 유럽 재정위기로 경영난을 겪고 있는 유럽 패션업체들이 적지 않다. 따라서 브랜드 인지도는 높지만, 매물로 나온 가격은 상당히 디스카운트된 상황이다. 이랜드가 인수한 만다리나 덕의 경우 불황을 겪으며 3년 전 다른 기업이 인수했을 때보다 100억원 이상 싼 금액에 인수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글로벌 시장에서 국내 기업의 위상을 일시에 도약시킬 수 있는 것도 인수에 적극적인 이유다. 삼성패션연구소 김정희 팀장은 "유럽 브랜드는 보수적인 유럽 패션시장에서 현지 유통망을 좀 더 쉽게 뚫을 수 있는 교두보가 된다"고 말했다.
명품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중국 등 아시아를 공략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 글로벌 시장에서 인지도가 낮은 한국 브랜드만으로는 중국 현지를 공략하는 데 힘이 달리기 때문이다. 중국 현지 유통업체를 상대로 기업 설명회를 할 때 전통 있는 해외 브랜드를 보유하고 있는 것이 신뢰도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LG패션 관계자는 "특히 중국의 경우 '○○브랜드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으로 회사를 알리고 유통망을 뚫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유럽 패션 브랜드를 인수해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한 외국의 성공 사례도 한국 기업들을 자극했다. 지난 10년 사이 영국 가죽 브랜드 멀버리는 싱가포르 기업이, 독일 패션 브랜드 에스까다는 인도 기업이, 프랑스의 랑방은 대만 기업이 인수해 글로벌 기업으로 키워냈다. 이들의 바통을 이을 차세대 주자가 바로 한국이라는 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