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원 김모(37)씨는 요즘 수익률이 좋다는 KB자산운용 펀드에 가입하려고 주거래 은행인 A은행을 찾아갔다. 그러나 이 은행은 KB자산운용 펀드를 취급하지 않는다는 답이 돌아왔다. 이 직원은 대신 "다른 펀드도 좋은 게 많다"며 이 은행 계열사인 A자산운용이 운용하는 펀드 설명서를 내밀었다. 금융판 '일감 몰아주기'라 할 수 있는 '펀드 몰아주기' 현장이다. 김씨는 "은행들이 계열사 펀드만 집중 판매하는 것 같다"며 "원하는 펀드에 가입하려고 매번 은행을 바꿔야 하느냐"고 말했다.
펀드 몰아주기는 경쟁을 제한함으로써 고객이 좋은 펀드를 싼 수수료로 가입할 수 있는 권리를 침해하고, 규모가 작은 독립 자산운용사의 성장을 저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제조 대기업의 일감 몰아주기 못지않게 부작용이 크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금융위원회 관계자는 "계열사 펀드 판매에 혜택을 주는 행위는 법률 위반 소지가 크다"며 "판매망을 독과점한 금융회사들이 불공정 행위로 고객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없는지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판매한 펀드 절반은 계열사 것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국내 10대 펀드 판매사(은행·보험·증권사)가 판매한 펀드 중 계열사(운용사) 펀드가 차지하는 비중은 10월 말 현재 평균 52%에 달한다. 1억원어치 펀드를 팔면 그중 절반은 계열사 상품이라는 뜻이다. 이 비중은 2006년 말 52%에서 2008년 49%대로 잠시 줄었다가 2009년 52%, 2010년 55%로 다시 올라갔다. 대한생명이 76%로 가장 높고, 신한은행 70%, 미래에셋증권 58%, IBK기업은행 57%, 삼성증권 52% 순이다.
최근 이 비중이 가장 많이 늘어난 곳은 KB국민은행이다. 2009년 말 35%였던 계열사 펀드 판매 비중이 지금은 52%에 이른다. KB국민은행은 2007년 미래에셋자산운용의 펀드를 많이 팔았으나, 지난해 어윤대 회장 취임 후 "KB자산운용 수익률이 많이 좋아졌는데 이왕이면 계열사를 도와주자"며 KB자산운용 펀드 판매에 집중한 것으로 알려졌다.
◇인사고과 반영, 해외 연수 보내주기도
금융회사들은 공식적으로 부인하고 있지만, 계열사 펀드를 많이 판매하는 직원을 인사 평가 등에서 우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금융회사 임원들은 자기가 맡은 부서가 달성해야 하는 실적 목표치를 정기적으로 부과받는다. 일명 KPI (핵심성과지표·Key Performance Index)라고 하는데, 펀드나 적금 판매 실적이 주된 구성요소이다. 그런데 계열사 펀드를 팔면 다른 회사 펀드를 팔 때보다 KPI 점수에 가중치를 주는 경우가 있다. '그룹 시너지 효과 창출 점수'라는 인사 평가 항목을 만들어 계열사 펀드 판매 시 우대하기도 한다.
그룹 차원에서 미는 특정 펀드를 많이 판 직원에게 해외 연수 같은 특혜를 주는 일도 종종 있다. 업계에선 이를 '캠페인'을 벌인다고 한다. 특정 펀드를 집중 판매하는 기간을 잡고, 실적을 많이 낸 직원을 모아 단기 해외여행을 보내주는 것이다. 비용은 대부분 계열사인 운용사가 부담한다. 이런 행위는 불공정 행위로 법에 위반될 소지가 있다. 그러나 업계에선 '지주회사 사회 공헌 활동' 같은 명분으로 포장하는 편법을 동원해 적발하기가 쉽지 않다.
◇미국은 '몰아주기' 규제
'펀드 몰아주기'가 고객에게 피해를 주는 것만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최기훈 신한BNP파리바 상무는 "계열사가 만든 펀드라면 운용 상황을 더 정확히 파악해 고객에게 좀 더 자세한 정보를 전할 수 있다"며 "펀드매니저가 어떤 사람인지, 매니저가 아픈지까지 알 수 있지 않으냐"고 말했다. 그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펀드를 팔아야 고객을 더 보호할 수 있다"며 "프랑스 등 유럽계 금융회사는 이런 이유로 99% 계열사 펀드만 판매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영미계 금융회사는 이런 계열사 펀드 판매를 규제하고 있다. 지난 2003년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계열사 상품을 판매한 직원에게 인센티브를 제공한 모건스탠리에 과징금 5000만달러를 부과한 적이 있다. 계열사 밀어주기를 범죄시하고 있다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