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저녁, 유경선 유진그룹 회장은 다급한 보고를 받았다. 계열사인 하이마트##와 관련된 것이었다. 하이마트 긴급 임원회의에 참석했던 한 관계자는 유 회장에게 "선종구 하이마트 회장이 임원들을 모아 놓고 새로 회사를 차리려고 한다"고 전했다. 충격을 받은 유 회장 역시 긴급 회의를 열고 대책 마련에 착수했다. 지난 1999년 하이마트 설립 이후 국내 가전유통 선두업체로 키운 선 회장이 경쟁사를 설립한다면 회사의 존폐를 위협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이날 보고가 하이마트 경영권 분쟁의 시작이었다.
24일 유 회장은 하이마트 임직원에게 보낸 이메일을 보냈다. 그는 "지난 11월 18일에 소집된 긴급 임원회의에서 선 회장 자신이 하이마트를 떠나 새 회사를 차릴 것이니 임원들은 11월 21일 월요일까지 동참 여부를 알려달라고 했다"고 설명한 뒤 "현직 대표이사로서 회사를 망가뜨리겠다는 그러한 발언에 이르러서는 충격을 금할 길이 없다"고 썼다.
또 "하이마트는 이제 선종구라는 개인의 회사가 아니다"며 "거래소 상장 전에도 대주주인 유진기업 뿐만 아니라 많은 재무적 투자자인 주주가 있다"고 덧붙였다.
유진그룹은 오는 30일로 예정된 하이마트 이사회의 안건을 '유경선 유진그룹 회장의 사내이사(공동대표) 재선임'에서 '대표이사 개임'으로 변경했다. 업계는 이를 통해 현재의 유경선·선종구 공동대표 체제가 유 회장의 단독대표 체제로 바뀔 것으로 보고 있다. 하이마트는 이에 반발해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초강수로 맞서고 있다.
◆ 예고된 경영권 분쟁
국내 최대 가전유통 전문회사
당시 직원들 사이에서는 “레미콘을 주력사업을 영위하고 있는 유진그룹 경영진이 왜 전혀 다른 사업인 가전 유통에 관여하는 지 이해할 수가 없다”는 말이 돌았다. 이에 앞서 지난 4월 서울 올림픽 펜싱경기장에서 열렸던 하이마트 10주년 행사 때는 유경선 회장 측이 불참하면서 양측에 분열의 싹이 트기도 했다.
그러나 두 회사 사이의 경영권 분쟁은 이미 지난 2007년 유진이 하이마트를 인수하면서 부터 내포됐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당시 연간 매출 7700억원 정도였던 유진이 매출 2조3000억원의 하이마트를 먹어 삼키면서 이른바 ‘승자의 저주’에 빠질 것으로 본 것이다.
때마침 M&A 이듬해인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졌고, 인수합병을 위해 1조3355억원까지 차입했던 유진그룹은 심각한 유동성 위기에 빠졌다. 이 때문에 유진그룹 측에서는 하이마트 경영에 관여할 여력이 없었고, 창업주이자 2대주주였던 선종구 회장에게 경영 전권을 위임할 수 밖에 없었다.
선 회장은 유진그룹이 하이마트 인수를 위해 설립한 특수목적법인(SPC) ‘유진하이마트홀딩스’에 사재 900억원을 투자하면서 2대 주주가 됐으며, 현재는 지분이 17.4%까지 늘어났다. 우호지분까지 더하면 27%를 넘는다.
이 과정에서 유진 측이 선 회장에게 일종의 경영권 보장 약속을 했는지의 여부는 불투명하다. 하이마트 측은 유진이 2007년 인수 당시 했던 경영권 보장 약속을 깨고 경영에 간섭하려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유진그룹은 그동안 하이마트와 선 회장의 전문성을 믿고 경영권을 위임을 했을 뿐, 이를 보장해주겠다는 약속을 한 적은 없다고 맞받아 치고 있다. 유진그룹 관계자는 “최대주주로서 경영권을 행사하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며 “상식적으로 경영권 이양을 전제하고 기업을 인수하는 회사가 어디 있겠느냐”고 반박했다.
◆ 유진그룹 “선종구 대표가 ‘새 회사 설립’ 밝히는 것은 해사행위”
한편, 선 회장이 하이마트를 떠나 경쟁사를 설립하려 한다는 유진 측 주장과 유진그룹의 ‘콜옵션(정해진 가격에 상대방 지분을 살 수 있는 권리)’ 행사 과정 대해서도 양 측의 ‘진실게임’이 벌어지고 있다.
하이마트 관계자는 “선 회장은 임원회의에서 유진이 경영을 맡게 되면 자신의 지분을 정리하겠다”고 했을 뿐이며 “이때 지분을 같이 처분하고 싶은 임원이 있다면 자신과 똑같은 조건으로 팔수 있게 해 주겠으니 21일까지 알려달라고 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유진그룹 관계자는 “선 회장이 18일 임원회의에서 새로운 회사를 설립하려 한다고 밝힌 것은 당시 그 자리에 참석했던 임원이 직접 들은 얘기”라며 “이는 명백한 해사(害社) 행위”라고 말했다.
유진그룹은 선 회장과의 지분경쟁을 위해 재무적투자자(FI)에 대한 콜옵션을 행사한다는 주장도 반박했다. 유진 측은 25일 성명서를 내고 “콜옵션은 하이마트의 성장성에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애당초 설정해놓은 것”이라며 “이에 대해서는 하이마트 재무책임자 등도 사전에 정보를 공유하고 있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