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달 전, A카드사 마케팅 담당 임원이 돌연 해임됐다. 임원 해임 사태를 촉발한 것은 연회비 60만원짜리 VVIP카드(카드업계에서 초우량고객 전용카드를 지칭하는 용어)였다.
A카드사는 특급 호텔과 제휴해 VVIP 카드 회원들에게 피트니스 무료 이용 서비스를 새로 선보였다. 회원권 가격 6000만원, 연회비 235만원인 호텔 피트니스센터를 연 50회 공짜로 이용할 수 있는 서비스였다. 하지만 당초 예상(300명 수준)보다 훨씬 많은 800여명의 신규 카드회원이 유치되면서 문제가 생겼다. 호텔 피트니스센터 측이 "공짜 손님이 너무 늘어나 기존 회원들이 반발한다"는 이유로 서비스 제휴 계약을 해지했기 때문이다. 카드사는 서비스 개발을 잘못해 VIP 고객들에게 피해를 끼친 임원에게 책임을 물었다.
B카드는 지난여름 특급 호텔 무료 숙박권을 앞세워 VVIP 카드 회원을 유치했다가 곤욕을 치렀다. 전국 20개 특급 호텔에 630박(泊) 분량의 호텔 룸을 확보했는데, 1000명 이상이 호텔 예약을 신청했기 때문이다. B카드사 관계자는 "1급 호텔을 대신 잡아주고 고객의 양해를 구하느라 혼났다"면서 "돈은 돈대로 깨지고, 엄청 욕을 먹었다"고 했다.
카드사들 간에 VVIP 카드를 둘러싼 마케팅 경쟁이 격화되면서, 카드업계 주변에선 쓴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풍경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 사실 VIP 고객들에게 제공하는 서비스는 원가(연회비)를 훨씬 웃돌아 수익만 따지면 적자다.
카드사들은 최근 가맹점 수수료 인하로 수익구조가 나빠지자 일반 회원에 대한 부가서비스를 대폭 축소하고 있다. 하지만 VIP 고객에 대한 서비스는 손을 대지 않고 있다. 왜 그럴까?
◇VVIP카드, 수익보다 비용이 더 커
카드사들은 연회비를 50만원 이상씩 받는 대신 무료 항공권, 특급 호텔 숙박권, 명품 구입권 제공 등 파격적인 부가서비스를 제공하는 VVIP카드를 2~3개씩 선보이고 있다.
카드사들은 '영업비밀'이란 이유로 VVIP 카드의 수익구조는 공개하지 않고 있지만, 대부분 적자를 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를 들어 신한카드의 프리미어카드(연회비 100만원) 고객은 1인당 월평균 500만원 정도를 쓴다. 카드사에 떨어지는 수익은 고객의 카드사용에 따른 가맹점 수수료(약 2%), 월 20만원이 전부다. 반면 카드사는 이 고객에게 항공 마일리지, 포인트 적립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월 12만~13만원의 비용을 지출한다. 게다가 회원이 항공기 좌석 업그레이드 서비스를 사용하면 연회비(100만원)를 웃도는 추가 비용이 발생한다. 예컨대, 회원이 서울~뉴욕 노선 비즈니스석을 일등석으로 올릴 경우, 좌석 승급 비용(정가 400만원)을 카드사가 부담한다. 항공사와 계약을 통해 상당폭 할인을 받기는 하지만 정가의 30% 이상을 지급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VVIP 카드는 회원이 서비스를 많이 이용하면 할수록 카드사가 손해를 보는 수익구조를 갖고 있다.
◇카드사들이 VVIP카드에 목매는 이유
카드업체들이 수익에 도움이 안 되는데도 VVIP카드 판촉에 목을 매는 이유는 브랜드 이미지를 제고함으로써, 신규 고객을 유치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삼성카드 관계자는 "회사가 품격 있고 '잘나간다는' 인상을 줘 일반 회원을 유치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결국 남는 장사라고 본다"고 말했다. 다른 카드사 임원은 "VVIP 카드 회원은 대부분 기업 CEO나 대기업 임원인 만큼 '인맥 네트워크'를 통한 카드 상품 추가 판매가 가능해 매력적이다"고 말했다. 또 VVIP카드는 연체율이 거의 0%라서 별도 위험관리 비용이 들지 않는다는 점도 장점으로 꼽힌다.
◇서민 상대로 번 수익, 부유층에게 퍼준다?
최근 카드사들은 가맹점 수수료 인하로 수익구조가 나빠지면서 카드 부가서비스를 감축하고 있지만, VVIP카드 서비스는 줄이지 않고 있다. 한 카드사 대표는 "VVIP카드는 '카드사의 얼굴'인 만큼 부가서비스를 줄이는 가장 마지막 대상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카드사의 이런 행태는 서민층을 상대로 연 20% 이상 고(高)이자율 대출(카드론·현금서비스)로 번 수익을 부유층에게 퍼준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VIP 고객 유치를 위한 마케팅 비용을 줄이고, 그 돈을 일반 카드 회원의 카드론 금리를 낮추거나, 서민층 가맹점의 수수료를 내리는 데 쓰는 게 바람직하다"고 지적했다. 금융소비자연맹 조연행 부회장은 "서민층 회원으로부터 돈을 벌어 '부자 마케팅'에 쏟아붓는 것은 도덕적으로 비난받아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