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부품을 조달해 휴대전화용 키패드를 만들어 미국에 수출하는 A기업 사장은 "요즘 환율 때문에 죽을 맛"이라고 했다. 엔화에 대한 원화 환율은 여전히 고공 행진을 하는 반면, 달러화에 대한 원화 환율은 한 달 새 100원 가까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A사 사장은 "원·달러 환율이 더 오를 줄 알고 대금 결제를 미뤘는데 갑자기 환율이 떨어지면서 앉은 자리에서 몇천만원을 날렸다"고 말했다.

전기제품을 수출하는 경남의 B사도 환율 급변동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환율 변동 위험 관리를 전혀 하지 않고 있는 이 기업은 수출 대금을 언제 받느냐에 따라 흑자냐 적자냐가 결정될 정도인데, 최근엔 환율이 하도 요동을 쳐 정신을 차리기 힘들 정도다.

이 회사 대표는 "보통 10월 초부터 내년 경영 계획을 짜는데 환율이 어떻게 움직일지 전혀 짐작이 안 가 사업계획을 짤 엄두를 못 내고 있다"고 했다.

널뛰기 환율에 대기업도 아우성

지난 8월 미국 신용등급 강등과 유럽 재정 위기 부각 이후 종잡을 수 없이 널뛰기하는 환율에 기업들이 아우성을 치고 있다. 8월 이전까지 1050~1100원 사이에서 완만하게 하향 그래프를 그리던 달러화에 대한 원화 환율은 9월 말 1195원대까지 치솟았다가 최근 1100원대로 다시 떨어졌다. 엔화 환율은 전례 없는 엔고(円高) 현상에다 일본 정부의 개입까지 맞물려 더 정신없이 요동치고 있다. 8월 이후 두 달간 17%나 치솟았던 엔화에 대한 원화 환율은 일본 정부가 외환시장 개입에 나선 31일 전날보다 22.78원(100엔당) 떨어졌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환율 움직임에 대기업들도 비상이 걸렸다. 포스코는 지난 3분기 외화부채의 평가손실이 8000억원에 이르면서 전 분기보다 순이익이 84% 감소했다. 하이닉스·LG디스플레이·현대제철 등 다른 대기업들도 달러화로 빌려온 차입금의 원화 환산 부채가 증가하면서 장부상으로 수천억원 평가손실을 입었다. 포스코 계열사인 성진지오텍은 자기자본의 20%가 넘는 340억원의 환차손을 입었다고 공시하기도 했다.

정준양 포스코 회장은 지난 9월 임원회의에서 "더욱 철저하게 (환율변동 단계별) 시나리오 경영을 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포스코는 최선·보통·최악 등 3단계로 나누어 짜 오던 경영 계획을 이보다 더 세분한 5단계로 나눴다.

포스코는 기본 환율 변동폭을 1050~1100원으로 예상하면서도 5번째 단계인 최악 시나리오에선 1200원대까지 고려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중소기업 삼중고에 시달려

그러나 환율 변동 리스크에 대한 노출은 중소기업이 훨씬 심각하다. 환율 리스크를 관리할 전문가나 노하우가 없는 경우가 많고,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때 키코 사태를 경험한 뒤 아예 환헤지 활동을 포기한 기업이 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환율 변동으로 손해를 입은 대기업의 '쥐어짜기'가 더 심해질 것이라는 공포까지 더해지고 있다. 경기도의 전자제품 부품업체 D사는 일본에서 부품을 들여와 가공해 대기업에 납품하는 회사다.

일본에서 들여오는 부품의 비용이 전체 비용의 30~40%를 차지하는데, 최근 엔고로 뛴 비용을 납품단가에 반영하지 못했다.

회사 관계자는 "대기업에 납품하는 1차 협력업체인 우리 기업의 마진이 떨어지다 보니 2차 협력업체 가격을 후려치는 악순환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성호 한국은행 기업통계팀 차장은 "9월 이후 환율이 급등락하면서 원자재 수입가격 부담이 늘어난 내수 기업이나 환율 변동성을 감내할 체력이 떨어지는 중소기업의 체감경기가 더 악화됐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