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은행은 2주 전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유명 유럽계 은행에서 "2억~3억달러 규모의 커미티드 라인을 열어 주겠다"는 제안을 받았다.
커미티드 라인(committed line)이란 마치 마이너스 통장처럼 달러가 필요할 때마다 언제든지 달러를 빌려 쓸 수 있는 은행 간 대출 약정을 말한다. 외국계 은행은 국내 은행에 달러 대출 창구를 열어주는 대가로 대출 약정액의 0.1~0.2%를 매년 수수료로 받는다.
국제 금융시장의 신용 경색으로 달러 가뭄을 걱정하던 A은행 자금 담당 부행장은 "이게 웬 떡이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제안을 한 유럽계 은행은 곧바로 조건을 하나 달았다. "지금 당장은 우리가 달러 자금이 부족하고, 당신 은행은 단기 달러 자금에 여유가 있으니 1개월 만기로 1억달러만 융통해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A은행은 장시간에 걸친 내부 회의 결과 결국 제안을 거절했다. A은행 임원은 "대외적으론 '2억~3억달러를 추가로 확보했다'고 발표해 신뢰도를 높일 수 있겠지만, 실상은 우리가 가진 달러를 시장 상황이 불안한 유럽에 내보내는 꼴이 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결국 A은행은 유럽계 은행 대신 아시아권에서 달러 차입처를 찾기로 했다.
하지만 일부 은행은 커미티드 라인 확보 대가로 유럽계 금융회사에 단기 달러 자금을 제공하는 조건을 받아들인 사례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달러 기근에 시달리는 유럽계 은행이 국내 시중은행에 단기 달러 자금을 빌려달라고 손을 벌리고 있다. '미끼'는 장기적인 달러 공급처, 즉 커미티드 라인을 열어주겠다는 것이다. 유럽계 은행의 제안은 국내 은행들이 단기 운용 달러 자금은 풍부한 데 비해, 만기가 긴 달러 자금을 추가로 융통하는 데는 어려움을 겪는 상황을 역이용해 '돈 장사'를 하려는 의도로 해석되고 있다.
실제 국내 은행의 중장기 달러 차입 가산 금리는 지난 9월 1.45%를 기록했고, 최근 국제 금융시장 경색으로 더욱 치솟은 상황이다. 국내 은행들은 금융 당국 권고에 따라 중장기 달러 차입을 늘리고 있어 장기 달러 자금이 아쉬운 상황이다.
그러나 금융계에선 유럽 은행들이 내민 손을 잡았다간 자칫 달러도 확보하지 못하고 비용만 치르기 십상이라는 우려가 많다. 유럽계 은행에 커미티드 라인 개설 수수료를 챙겨주고, 모자라는 달러 자금까지 융통해주는 거래를 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국내 금융계의 한 원로는 "유럽 은행들이 입 하나로 달러를 챙기려고 한다. 커미티드 라인이 구속력이 있다 해도 2008년 리먼 사태 당시에는 커미티드 라인도 (외국계 금융회사들이) 약속을 이행하지 않은 사례가 많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고 말했다.
유럽계 은행들은 지난 9월에도 국내 지점들을 통해 은행 간 단기 자금 거래 시장인 콜시장에서 한국 달러 자금을 대거 차입하다 금융감독원의 경고를 받은 바 있다. 현재 유럽계 은행들이 국내 콜시장에서 빌려간 달러는 총 100억달러(7일 기준)에 이른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