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이건희 회장은 최근 들어 사장단회의를 소집하는 일이 부쩍 잦아졌다. 이번 주 금융계열사 사장단, 부품 계열사 사장단을 불러 회의를 가진 데 이어 내주에는 삼성전자 최지성 부회장 등 세트(완제품) 부문 사장단회의도 가질 계획이다. 이 회장은 지난 4월 21일 서초동 사옥 출근 이후 이미 금융과 전자계열사 사장단회의를 한 차례를 개최했는데도 이번에 다시 회의를 소집한 것이다.
이 회장은 사장단회의 때마다 "위기의식을 가질 것"과 "위기를 돌파할 핵심 인재를 확보하라"고 주문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 관계자는 "이 회장께서 인재 확보나 신사업 추진에 소극적인 사장들에 대해 질책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고 말했다. 예컨대 삼성의 5대 신수종 사업과 소재사업이 부진한 데 대해 강하게 질책했다는 것이다.
삼성 경영진 역시 이 회장이 당초 예상과 달리 상시(常時)출근체제로 들어가자 바짝 긴장하고 있다. 특히 삼성그룹 경영을 총괄 조정하는 미래전략실 임원들은 여름휴가도 반납하고, 공휴일에도 근무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건희 회장의 잦은 회의 소집에 대해 겉으로는 "이번 금융위기와 별개로 이미 예정된 회의"라고 밝히지만 내부적으로 상당히 긴장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삼성의 긴장도가 고조되는 것은 반도체·LCD·TV 등 기존 주력 사업의 둔화 조짐이 뚜렷한 가운데서 대외적 경영 여건이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 정도로 악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주만 해도 미국의 신용등급 강등, 독일 법원의 삼성전자 갤럽시탭 10.1 유럽 수출 금지 가처분 신청 수용, 반도체 가격 폭락 등 메가톤급 악재(惡材)가 잇따라 터져나왔다.
글로벌 경쟁업체들의 삼성 견제도 갈수록 집요해지고 있다. 애플이 세계 곳곳에서 삼성전자를 상대로 특허소송을 제기하는 것 외에도 마이크로소프트, 독일의 조명업체 오스람 등이 삼성전자·삼성LED 등을 상대로 수천억원대의 기술사용료를 요구하거나 소송을 제기한 상태다.
일본과 대만의 경쟁업체들도 내놓고 삼성 타도를 외치고 있다. 9일 일본의 경제지 후지산케이 비즈니스는 '삼성 침체, 일본 업체들에 역전의 기회 부여'라는 기사를 통해 삼성의 2분기 실적 부진을 거론하며 "일본 기업을 몰아내던 삼성의 필승 패턴이 무너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선두 재탈환 기회를 엿보고 있는 일본 업체와 삼성을 맹추격하고 있는 중국 업체에 낀 '절대왕자(삼성전자)'의 위상이 흔들린다는 것이다.
또 애플 아이폰 등을 외주 제작하는 대만계 홍하이그룹 궈타이밍 회장은 8일 일본 주간지 니케이일렉트로닉스와 인터뷰에서 "일본과 대만 기업이 함께 삼성전자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도 일본 히타치와 소니·도시바가 삼성에 대항해 휴대폰용 소형 LCD 합작 법인 설립을 추진하고 있으며, 애플도 대만 반도체 TSMC로부터 모바일용 반도체를 구매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삼성전자가 세계 1위의 IT 제조업체로 부상하자 해외 경쟁업체들이 집중적으로 삼성을 공격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내 상황도 만만치 않다. 휴대폰과 TV·가전 등 국내 전자제품시장이 성장 정체를 보이고 있는 데다 일부 정치권의 대기업 때리기, 감세 철회 움직임과 복수 노조 시행 등 경영 외적 요소들로 인해 삼성 임직원들이 기업 경영과 제품 개발에 올인하기 힘든 상황이 잇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삼성그룹은 그러나 대외적인 불확실성 속에서도 올해 예정된 기술·설비 투자는 계획대로 집행한다는 방침이다. 여기에는 위기 때 공격적인 투자로 경쟁업체와 격차를 더 벌리겠다는 전략적 판단과 "삼성이 어려울 때 위기를 조장한다"는 비판을 듣지 않겠다는 생각이 복합적으로 깔려 있다.
재계 관계자는 "기업들이 대외 여건보다도 국내의 정책적 불확실성을 더욱 걱정한다"면서 "자칫 정부와 정치권이 삼성·현대차 같은 대기업의 글로벌 경쟁력까지 훼손하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