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스타일의 게임을 만들어보려고 10년 넘게 서양환타지로 경험을 쌓아왔다. 처음으로 도전하는 우리 스타일의 게임이 블레이드앤소울(블소)이다. 동양의 자부심을 그리고 싶다. - 일하다 나와 회사 옥상에서 벌벌떨며…어이 춥다"

"블소 테스트하다 까만 밤하늘을 보며 집에 들어간다. 하얀 사무실 불빛 속에 남기고 온 동료들과 아이들을 품고 자고 있을 우리들의 아내들과 남편들이 아른거린다. 미안함과 고마움 속에 또 새벽별 보기가 시작되었다. 하루하루 땀방울 속에 꿈이 자라났으면"

1990년대말 온라인 게임 신화를 쓴 엔씨소프트##의 김택진 대표가 지난해말 트위터에 올린 글이다. 명실공히 세계 게임업계의 거물로 성장한 그의 한국 게임산업에 대한 고민은 여전히 깊었다.

김 대표는 지난 1997년 현대전자에서 일하던 중 동료 16명과 함께 자본금 1억원으로 엔씨소프트를 창업했다. 이듬해 9월 세상에 내놓은 온라인게임 '리니지'는 미국 블리자드가 만든 '스타크래프트'와 게임 업계의 양대산맥으로 떠올랐다. 당시 그의 나이는 31살에 불과했다.

◆ 국산 온라인 게임 '리니지' 신화의 주역

1967년 서울에서 태어난 김 대표는 대일고와 서울대 전자공학과(85학번)를 졸업했다. 그는 대학 재학시절 이찬진 현 드림위즈 사장과 '아래아한글'을 공동 개발한 프로그래머 출신으로 한메소프트를 창업하기도 했다. 졸업 후인 1991년 병역특례차 연구원으로 입사한 현대전자에서 인터넷서비스(아미넷 개발팀장)를 담당하다 회사의 지원으로 서울대에서 박사 학위를 밟던 도중 엔씨소프트를 창업했다.

리니지는 온라인 게임의 신화로 꼽힌다. 유료 서비스(98년9월)를 시작한 지 1년 3개월 만에 회원수가 100만명을 돌파하고 2년만에 700만명을 넘어서는 국내 게임 역사상 신기록을 세웠다. 2000년 12월에는 동시접속자수 10만명을 훌쩍 뛰어넘으며 명실공히 세계 최대수준의 온라인 게임으로 성장했다. 게이머들을 사로잡은 리니지는 당시 가정으로 급속도로 보급된 초고속통신망과 하루가 다르게 늘어난 PC방의 등을 타고 폭발적인 성장가도를 달렸다.

김 대표의 전략도 적중했다. 하나의 게임 성공 이후 다른 다양한 게임을 선보였던 당시 다른 업체와는 달리 엔씨소프트는 리니지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집중했다. 인터넷 기반의 리니지 플랫폼을 다양화하고 엔터테인먼트 포털 사이트 '웹라이프'를 열어 리니지 사용자들만의 커뮤니티를 구축하는 등 리니지 기반의 연관사업을 확장했다.

리니지는 특히 해외 진출로 전성기를 맞았다. 대만ㆍ태국ㆍ일본ㆍ유럽ㆍ미국 등에 잇따라 현지법인을 설립해 리니지의 신화를 써내려갔다. 당시 김 대표는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외국에 돌아다니다 보니 기성세대가 존경스럽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됐다"면서 "지금도 외국에 나가면 한국에 대한 인식이 척박하기 그지없는데 이 보다 훨씬 더 어려운 시절에 어떻게 자동차, 건설 등을 해외에서 일궈냈는지 (기성세대가) 존경스럽다"고 말하기도 했다.

리니지 '돌풍' 덕택에 엔씨소프트의 실적은 그야말로 고속성장이었다. 1997년 창업 첫해 5억원에 불과하던 매출이 2년 뒤인 1999년 80억원으로 뛰더니 2000년에는 무려 570억원으로 급팽창했다. 엔씨소프트는 이런 성장을 바탕으로 2000년 코스닥시장에 화려하게 상장하며 벤처 열풍의 명맥을 이었다. 이후 온라인게임 퍼블리싱 사업에도 진출하고 '리니지2', '길드워', '아이온' 등 연속으로 히트작을 내며 세계적인 게임업체로 발돋움했다.

엔씨소프트는 지난해 국제회계기준(IFRS) 매출액 6497억원, 영업이익 2429억원을 거뒀다. 국내 매출 4166억원 뿐만 아니라 일본 792억원, 북미 486억원 등 해외 매출도 두드러졌다. 김 대표가 보유한 회사 지분은 540만주(24.79%)로 현 주가인 30만원대로 단순 계산해도 1조6000억대에 달한다.

◆ 게임산업에 대한 깊은 애정

“온라인 게임은 우리가 어린 시절 오락실에서 했던 ‘자극과 반작용’ 게임이 아니다. 동화 속 세계로 들어가 사이버세계를 구축하고 그 속에서 우정ㆍ사랑ㆍ욕심ㆍ성취를 다루는 삶의 세계다.”

김 대표는 리니지의 성공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다. 평소 게임이 청소년 교육의 수단이 될 수 있다고 말했던 그는 2000년대 청소년들의 우상이기도 했다.

그는 게임 제작 원칙으로 첫번째 눈과 귀가 즐거운 게임, 두번째 개념이 충만한 게임, 세번째 사람들을 연결하는 게임, 네번째 게임을 모르는 사람도 즐길 수 있는 모두의 게임을 꼽는다. 김 대표는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사람들의 생활을 생기있게 하는 게임인지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엔씨소프트가 사회공헌활동의 일환으로 국내 아홉번째 프로야구단을 창단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그는 “내게 있어 야구는 어렸을 때부터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이었다”면서 “야구와 관련된 사회공헌을 통해 기업의 역할과 책임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엔씨소프트는 올 초 한국야구위원회(KBO)에 야구단 창단 신청서를 제출해 지난 3월 야구단 창단을 최종 승인받았다. 공룡 화석이 유명한 경상남도 창원시를 연고지로 하는 만큼 구단명은 공룡을 뜻하는 ‘다이노스’로 정하고 NHN의 네이버 스포츠를 담당하던 이태일 이사를 구단 대표로 선임했다.

◆ 검소하고 소탈한 독서광

김 대표는 오래전부터 일주일에 평균 2권의 책을 읽을 정도의 ‘독서광’이다. 인문 고전부터 과학ㆍ사회분야 실용서 등 언론에 알려진 그의 추천서적도 다양하다. 그는 적어도 한 달에 한두 번 트위터를 하는 유명인사로도 잘 알려졌는데, 대다수의 글은 그가 읽은 책에 나오는 감명 깊은 어구들이다. 지난 6일에는 “대부분의 성공은 순전히 최초의 비전이 운 좋게도 시대의 흐름과 잘 맞아떨어졌는가에 달려있다”면서 “하지만 지금의 비전이 그런지 아는 것은 불가능하고 리더의 주요 역할은 끊임없이 조직의 다음 전략적 선택지를 찾아내는 것이다”라고 트위터에 올렸다.

그는 천주교 신자이자 조용필 노래를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평소 생활도 검소하고 소탈하다는 평이 많다. 2000년대 초반 그가 수천억대의 벤처 갑부로 떠올랐을 때에도 상장 당시 갖고 있던 지분을 단 한주도 팔지 않고 오래전부터 타던 승용차와 살던 아파트도 그대로 유지했다고 한다.

김 대표는 평소 아버지를 존경하고 시간이 날 때마다 가족과 함께한다고 한다. 언론과의 한 인터뷰에서는 자신의 여가 활용법으로 ‘아이들과 신나게 놀아주기’를 꼽기도 했다. 트위터에도 간간이 그의 가족에 대한 글을 올린다. 지난해 말에는 “발레는 인간의 몸짓이 얼마나 우아할 수 있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우리 안에 신성이 깃들어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 - 라 바야데르 보자고 한 와이프한테 끌려가서 느낀 점”이라고 했다.

◆ 이혼과 재혼…비밀스런 개인사

서른살 초반 당시 젊은 갑부로 떠올랐던 김 대표는 비밀스런 이혼과 재혼으로 또다시 업계를 떠들썩하게 했다. 현재의 아내인 8살 연하의 윤송이 전 SK텔레콤 상무와 재혼해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2004년 11월 전 부인과 이혼하고 나서 재산분할로 300억원대의 주식을 증여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 대표와 윤 전 상무는 2007년 11월 양가 부모만 모시고 비밀 결혼식을 올렸고 이듬해 출산을 앞둔 6월 말에야 결혼사실이 세상에 알려졌다.

비밀스런 재혼 뿐만 아니라 ‘두 천재의 만남’으로도 큰 화제가 됐다. 서울과학고와 KAIST를 수석 졸업한 윤 전 상무는 미국 MIT 미디어랩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28세라는 젊은 나이에 SK텔레콤의 상무 자리에 오른 ‘유명인사’였다. 그는 현재 엔씨소프트의 부사장으로 최고전략책임자를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