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오 실험실이 넓어지고 있다. 실험실을 가득 메우던 장비들이 점점 크기가 줄어들면서 여유 공간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방 하나를 가득 채우던 세포 배양 장치가 탁자 위에 두고 쓸 수 있을 만큼 작아졌고, 소형 냉장고 크기이던 세포 분석기는 토스터 크기로 줄었다. 연구실을 비워도 실험 결과를 스마트폰으로 전송해주는 '똑똑한' 장비들도 늘고 있다.

나노엔텍의 자동 형광 현미경 '줄리'(JuLI). 오염 방지 인큐베이터 안에서 세포 배양과정을 동영상이나 사진으로 찍어 스마트폰이나 웹사이트로 자동 전송한다.

우리나라가 바이오 장비의 개인화, 소형화, 지능화에서 뚜렷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외국산 바이오 장비를 국산 장비로 대체하고 있을 뿐 아니라 선진국 기업의 독무대이던 해외 시장도 공략하고 있다. BT(생명공학기술)가 세계 최고 수준의 IT(정보통신기술)와 만나 이룬 성과다.

세포 배양 전 과정을 한 장비로 해결

바이오 장비 업체인 나노엔텍이 만든 탈리(Tali)는 세포의 유전자 분석과 독성 분석을 한 번에 해주는 장비다. 외국산 제품이 소형 냉장고 크기이지만 탈리는 토스터 크기에 불과하다. 이미 미국의 바이오 기업인 라이프 테크놀로지(Life Technologies)가 전 세계 연구실에 팔고 있다.

로고스바이오시스템스가 개발한 세계 최초의 개인형 무인세포배양 시스템‘셀프(CELF)’

로고스바이오시스템스는 최근 세포 배양에서부터 현미경 촬영까지 모든 과정을 자동으로 해주는 기기를 개발했다. 실험실에서 일일이 손으로 세포 배양접시에 배양액을 갈아주고, 세포의 성장 여부를 현미경으로 확인하던 것을 한 번에 자동으로 해결해주는 장비다. 이 회사 정연철 대표는 "외국 제품은 방 하나를 다 차지할 정도로 큰데 우리 제품은 책상에 올려놓을 정도 크기이고 가격도 외국산이 10억원대인데 우리는 4000만원"이라고 말했다.

바이오니아는 질병 진단용 실시간 유전자 증폭(PCR) 장비를 개발했다. 이 장비는 신종플루에서 B형과 C형 간염, 결핵 등을 일으키는 6종의 바이러스를 동시에 검사할 수 있다. 박한오 대표는 "기존 제품이 바이러스가 있는지만 확인했다면 우리는 바이러스의 양까지 확인이 가능하다"며 "환자가 약 먹고 바이러스가 얼마나 줄었는지를 알아내 약에 대한 내성(耐性) 발생 여부까지 알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의 앞선 IT 인력이 경쟁력

국내 바이오 장비 업체들이 거둔 성과는 기존 제조업의 앞선 기술력을 과감히 바이오 분야에 접목한 덕분이다. 바이오니아 박한오 대표는 "자동차와 전자산업을 모두 갖고 있는 나라는 세계에서 5개국에 불과하다"며 "BT와 융합할 수 있는 기술적 기반이 그만큼 탄탄한 것"이라고 말했다.

로고스바이오시스템스 정연철 대표는 "서울디지털밸리 일대에 밀집된 IT 업체들을 활용한 것이 성공 비결"이라고 말했다. 이 회사의 연구인력은 8명에 불과하다. 대부분 설계 인력이다. 부품이나 시제품 제작은 모두 구로와 가산디지털밸리의 아파트형 공장에서 조달했다. 대부분 우리나라가 세계 시장을 잡고 있는 휴대폰이나 TV 등에 쓰던 부품이라 기술력은 이미 검증된 상태다.

나노엔텍이 개발한 자동 세포분석기(사진 오른쪽)는 기존 제품(왼쪽)에 비해 크기가 크게 줄었다.

덕분에 외국에서 생각하지 못한 새로운 기능을 갖춘 제품들이 나오고 있다. 외국 바이오 장비는 버튼을 눌러 조작을 한다. 하지만 국내에서 개발된 제품들은 대부분 휴대폰이나 내비게이션에 쓰이는 터치스크린을 달고 있다.

휴대폰에 쓰이는 무선통신기술도 바이오 장비에 적용되고 있다. 세포를 현미경으로 찍으면 바로 무선통신을 통해 집에 있는 연구자의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 전송해준다. 주말에 실험실에 나오지 않고서도 세포의 상태를 수시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국내 업체들은 스마트폰용 전용 앱(응용프로그램)도 잇따라 개발했다.

한국화학연구원 서영덕 박사는 "현미경에 원격 조종장치나 자동 영상분석 기술만 적용하면 바로 가격이 3~4배로 뛸 수 있다"며 "우리의 앞선 IT 능력을 바이오 장비에 접목하면 3~4년 내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충분히 갖출 수 있다"고 말했다.

연구개발비 해외 유출 막을 대안

국내 업체들이 개발한 바이오 장비는 실험실의 인력과 시간을 크게 줄일 수 있을 뿐 아니라 국가 연구개발비의 해외 유출과 무역 역조도 막아낼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보통 바이오 분야 정부 연구개발비의 70% 이상이 연구용 장비나 소모품 구입에 사용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정부 관련 통계에 따르면 2003년부터 2009년까지 장비 구입에 투자된 금액은 연평균 6399억원. 이중 대부분이 수입 장비임을 감안하면 연간 최소 5000억원 이상의 바이오 장비가 수입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비해 국내 기업의 수출액은 연간 500억원 미만으로 심각한 무역 역조현상을 낳고 있다. 국산 바이오 장비는 이 문제를 해결할 훌륭한 대안이다.

수출 전망도 좋다. 국내 업체들이 개발한 바이오 장비는 크기가 작아 가격이 대부분 수천만원 대이다. 이에 비해 외국 제품은 크기도 클 뿐 아니라 가격도 수억~수십억원대이다. 하지만 전 세계 대학이나 병원 연구실의 80% 정도는 연구원 서너명에 한 해 연구비가 1억원 근처이다. 이런 곳에서 10억원짜리 장비를 살 수는 없는 법. 국산 소형 장비가 노리는 시장도 바로 이런 곳이다.

국내 시장에서 성능 평가 지원해야

국내 업체들은 바이오 장비의 최종 소비자인 대학과 기업 연구자들의 수준이 높아 개발된 장비의 테스트베드(test bed 시험무대)에 좋은 환경이라고 입을 모은다. 문제는 국내에서 개발된 장비가 연구자들의 손에 들어가기가 힘들다는 데 있다.

나노엔텍이 개발한 유전자주입기는 미국 기업에 1292만달러(약 200억원)를 일시불로 받는 조건으로 기술 수출됐다. 하지만 처음 이 장비가 국내에 출시했을 때 사가는 사람이 없었다. 선진국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는 제품을 구매해야 연구비를 제대로 썼다고 인정받는 분위기 때문이었다. 나노엔텍 장준근 대표는 “유전자주입기가 미국 시장에서 인정을 받자 국내에서 해외 제품인 줄 알고 역수입하는 일도 일어났다”고 말했다.

지식경제부도 이런 문제를 인식해 지난해 초 보고서에서 "국산 바이오 장비의 기술개발을 지원하기 위해 성능 인증 프로그램을 확대해 국내 시장에서의 시장점유율을 확대해야 한다"며 "정부기관에서 국내 우수제품의 의무 사용 할당제를 실시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