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공정에 이상이 생겼을 때 원인을 찾아보면 '불순물'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불순물을 어떻게 찾을까. 최근 어떤 불순물인지를 가리고, 심지어 '불순물이 어디서 왔는지'를 알아낼 수 있는 첨단현미경이 개발됐다.
한국화학연구원 나노바이오융합연구센터 서영덕 박사는 물질의 모양을 나노미터(㎚·10억분의 1m) 크기까지 보여줄 뿐 아니라 화학적 성질까지 한 번에 알려주는 현미경을 만들었다. 이를테면 물질의 '얼굴'과 그 뒤에 숨은 '마음'까지 한 번에 보여주는 꿈의 카메라를 만든 것이다. 이런 현미경은 러시아나 이스라엘에도 있지만 분석 능력이 아직 국산에 못 미친다.
◆모양만 보여주던 현미경은 가라
지난 6일 대전 한국화학연구원 나노바이오융합연구센터. 신발을 갈아신은 다음 3개의 문을 차례로 열고 들어가니 견고하게 닫혀 있는 두꺼운 철문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서 박사는 "안에 누구 실험 중인가?"라고 여러 번 외치더니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조심스레 형광등 스위치를 올렸다. 현미경에 복잡한 장치가 연결된 '분자나노경(鏡)'이었다. "광자(光子·빛 알갱이) 하나까지 잡아낼 수 있는 고가(高價)의 센서들이 있어 형광등을 함부로 켜면 안 됩니다."
물질 상태까지 알려주는 분자나노경의 비밀은 이른바 '라만(Raman) 신호'에 있다. 빛 알갱이인 광자는 물체에 부딪히면 반사되거나 투과되며 에너지를 약간 잃어버리는데, 이를 측정한 것이 라만 신호다. 라만 신호는 물체마다 다르기 때문에 이를 측정할 수 있으면 물체의 상태를 알 수 있다. 하지만 라만 신호는 너무 약해 그동안 제대로 활용되지 못했다.
연구진은 원자현미경의 바늘을 금이나 은 알갱이로 만들고 이곳에 레이저를 쏘면 라만 신호가 1만~1000만배 증폭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원자현미경은 지름이 1~10㎚ 정도인 아주 가는 바늘로 물체의 표면 위를 스치듯이 지나가며 모양을 읽어낸다. 동시에 라만 신호도 측정해 물체의 성질까지 알아낸다.
◆멈췄던 디스플레이 공정 재개시켜
서 박사는 "기존 현미경으로는 알 수 없던 화학적 정보까지도 알 수 있는 세계 최고 수준의 장비"라면서 "생체물질을 대상으로 하는 연구나 정보기술(IT) 산업 생산에 유용하게 쓰일 것"이라고 말했다. 요즘 나오는 첨단 전자현미경은 수십억원까지 호가한다. 서 박사팀은 그보다 훨씬 적은 6억원으로 분자나노경을 만들었다.
산업현장에서는 이미 성과가 나오고 있다. 기존 현미경으로는 '어떤 불순물이 들어 있는지' 정도만 알 수 있지만 분자나노경을 이용하면 '어디서 온 불순물인지'까지 단번에 알아내 해결책을 빨리 제시할 수 있다. 반도체나 디스플레이의 경우 불순물이 들어가면 생산 라인을 세워야 하는데 이 기간을 얼마나 줄일 수 있는지가 생산성의 관건이다.
국내 굴지의 석유화학회사인 A사는 일본에 수출하던 디스플레이 도광판에서 불순물을 발견했지만, 어디서 섞인 불순물인지를 알 수 없어 2개의 공장을 일주일째 멈추고 있었다. 서 박사 연구진은 분자나노경으로 불순물이 처음 나온 공정을 지목, 문제를 해결했다.
반도체회사인 B사는 석영으로 만든 기판 위에 회로를 만들었는데 이 과정에서 나온 불순물이 어디서 왔는지를 분자나노경으로 찾아내고 문제점을 개선했다. 분자나노경을 이용해 경쟁사의 특허 기술을 분석, 신제품을 개발한 회사도 있다.
나노바이오융합연구센터 전기석 박사는 "최근 공식·비공식 경로로 국내 IT제품이나 공정의 하자를 분석해 달라는 문의가 계속 들어오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