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자동차시장에서 ‘수입차=독일차’라는 등식이 점차 굳어지고 있다.
8일 한국수입자동차협회(KAIDA)에 따르면 지난 4월 판매된 수입차 8204대 중 독일산 자동차는 전체의 68%인 5575대였다. ‘10대 중 7대’가 독일차였던 셈이다.
브랜드별 판매 1위도 BMW(2253대)로, 4월 수입차 총 판매량의 27%를 차지했다. 307대가 판매된 BMW의 소형차 브랜드인 미니, 2대 팔린 고급브랜드 롤스로이스를 합하면 BMW그룹 단일 업체가 전체 수입차 시장의 30%를 점유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달 브랜드별 2위는 벤츠(1339대), 3위 폴크스바겐(1062대), 4위 아우디(749대)로 독일 브랜드가 1~4위를 차지했다.
지난달 가장 많이 팔린 수입차 상위 10개 차종 중 9종이 독일산이었다. 판매 1위였던 BMW 528i(595대)를 비롯, BMW는 ‘TOP 10’ 중 4개 모델을 진입시켰다. 6위였던 도요타 캠리(232대)를 제외하고는, 비(非) 독일산 자동차를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다.
이 같은 독일차 판매 실적은 작년 같은 달에 비교해도 크게 성장한 것이다. 2010년 4월 독일차의 수입차 시장 점유율은 48.2%에 불과했지만, 1년 만에 20%p가 급증했다. 반면 일본차와 미국차의 판매량은 대조적으로 약세다. 작년 4월 일본차의 점유율은 31.3%, 미국차는 12.4%에 달했지만, 올 4월에는 각각 15%, 6.9%로 반토막이 났다.
◆ 잘 나가는 독일차…국산차와 가격차 줄고 경쟁력 있는 신차 쏟아져
이처럼 독일차가 잘 나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가격대가 예전보다 낮아졌다. 고급차 브랜드인 BMW와 벤츠는 주력 모델인 중형세단들의 가격을 기존 모델과 동결하거나 오히려 인하했다. 반면 비교 대상이던 현대자동차##제네시스·에쿠스 등 국산 고급차의 가격은 지속적으로 올랐다.
신형 BMW 528i의 가격은 6790만원. 차가 완전히 바뀌었지만 구형(6750만~7750만원)보다 싸졌다. 대리점에 가서 BMW코리아의 할부금융서비스를 받으면 수백만원의 할인 혜택도 받을 수 있다. 2012년형 현대차 제네시스는 4310만~6290만원이다. 저가 사양은 제네시스가 확실히 저렴하지만, 최고급 모델과 BMW의 가격차이는 500만원 정도로 좁혀진 셈이다. 현대차는 '정가 판매'를 시행 중이지만 BMW는 현장 할인폭이 만만치 않아 실제로는 가격차이가 거의 사라졌다.
고급차 시장에서는 독일차와 국산차의 가격차이가 줄어드는 사이, 높은 상품성을 갖춘 독일산 대중차의 국내 출시도 크게 늘어났다. 폴크스바겐의 경우 수입차 시장에서 20~30대 소비자 판매 1위인 준중형 해치백(트렁크와 뒷좌석이 합쳐진 형태) 골프를 총 5개 모델이나 내놨다. 가격도, 엔진 라인업도 각양각색이다. L당 21.9km를 달리는 하이브리드급 연비의 ‘1.6 블루모션’부터 스포츠카 수준의 성능을 발휘하는 ‘GTI’까지 선택 폭이 크게 넓어졌다.
특히 폴크스바겐이 최근 내놓은 준중형 세단 ‘신형 제타 1.6 TDI 블루모션’은 일반 경유엔진을 탑재했지만 연비가 L당 22.2km에 달한다. 비슷한 시기 출시된 현대차 중형세단 쏘나타 하이브리드(L당 21km)보다 연비가 오히려 좋다. 차체 크기의 차이가 있지만 비슷한 가격에 낮은 배기량을 통한 유지비 절감으로 수입차의 경제성이 국산차를 앞선 것이다. 이처럼 독일차의 가격적인 강점이 부각되는 가운데, 한-EU 자유무역협정(FTA)이 발효되면 독일차의 판매 경쟁력은 더욱 강화될 전망이다.
업계 관계자는 “독일 자동차업체들은 한국 뿐 아니라 중국 등 신흥시장 공략에도 적극적으로 나선 결과, 크게 늘어난 판매량에 따른 매출 증대를 바탕으로 경쟁력 있는 다양한 신차들을 개발해 내놓고 있다”고 말했다.
◆ 일본차, 엔고·생산차질 이중고… 신차 투입도 늦어져
독일차가 유례 없는 호황을 누리는 사이 일본차의 입지는 좁아지고 있다. 엔고(高)에 따른 가격 경쟁력 저하와 신차 부재가 주된 요인으로 꼽힌다. 3·11 일본 대지진으로 생산차질이 발생하는 한편, 당초 예정됐던 신차 출시도 미뤄지는 등 악재가 겹쳤다.
일본차의 판매 하락세는 3년째 이어지고 있다. 2008년 미쓰비시, 2009년 도요타, 2010년 스바루 브랜드가 한국에 진출하며 일본 브랜드 수가 2배로 늘었지만 일본차의 국내 비중은 감소하고 있는 것이다.
2008~2009년 6만대 규모였던 수입차시장은 작년 9만대로 늘었고, 올해는 10만대 돌파가 무난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전체 시장이 커지면서 일본차 판매가 양(量)적으로는 늘었지만 상승폭은 둔화되고 있다. 2008년 전체 시장의 36%를 차지했던 일본차 비중은 2009년 28%, 2010년 26%로 점차 감소하고 있다. 반면 2008년 42%였던 독일차는 작년 57%로 늘어났다.
일본차의 판매 둔화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원·엔 환율 폭등이다. 2008년 최저 100엔당 877원이던 원·엔 환율은 6일 현재 1345원(매매기준·외환은행 고시기준)까지 치솟았다. 혼다코리아·한국닛산 등 일본 업체들은 신차 수입 시 엔화로 대금을 결제한다. 원·엔 환율이 오를 때마다 한국 판매법인들이 환차손을 입게 되는 구조다. 때문에 엔화가 오를 수록 상품 경쟁력을 발휘하기가 어려워진다.
업계에 따르면 한국도요타의 나카바야시 히사오 사장은 지난달 국내 딜러들과 함께 미국 출장길에 나섰다. 엔화가 오름에 따라 미국에서 생산되는 도요타 차종을 한국 시장에 대체 투입하는 방안을 검토하기 위해서다. 이르면 올해 안으로 미국 켄터키공장에서 생산된 도요타 차량이 한국 시장에 출시될 전망이다. 도요타가 한국 시장에 공식 진출하기 전인 1990년대 초에는 일부 수입차 딜러들이 미국에서 생산한 도요타 대형세단 아발론을 우회 수입·판매한 전례도 있다.
일본차의 신차 교체 주기(5~6년)가 독일이나 한국차 업체들보다 긴 것도 약점으로 꼽힌다. 혼다의 경우 어코드·시빅 등 일부 대표 차종만으로 수년째 주력 라인업을 구축하고 있다. 도요타·닛산은 중형세단 캠리·알티마를 제외하고는 대량판매를 노릴 만한 모델이 없다. 혼다는 신형 시빅을, 닛산은 ‘박스카’ 큐브 출시를 추가 투입해 판매량 확대를 노린다는 방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