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A사의 베스트셀러 제품인 MP3플레이어 제품을 분해했다. 녹색 기판 위에 쌀알 크기에서 손톱 크기까지 다양한 모양의 반도체들이 빼곡히 박혀 있다.

기기의 '두뇌'에 해당하는 반도체인 CPU(중앙처리장치) 위에는 'ATN'으로 시작하는 부품 코드가 찍혀 있었다. ATN은 미국 나스닥에 상장된 중국 반도체 회사 '액션즈'의 약자. 라디오 주파수를 잡아주는 반도체인 'FM튜너'와 각종 칩세라믹도중국제였다. 이 기기에 사용된 반도체 수는 모두 91개. 이 가운데 37개가 중국제였다. 국산은 6개, 45개는 일제였다.

A사 제품 설계 담당자는 "4~5년 전까지만 해도 CPU를 중국제로 쓴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지만 최근 2~3년 사이 중국 반도체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해 중국제 반도체를 점점 더 많이 쓰고 있다"고 말했다.

반도체는 우리나라가 미국·일본 주도의 세계 시장에 뛰어들어 역전에 성공하며 1위에 올랐다. 삼성전자는 1993년 일본 도시바를 제치고 메모리 반도체 세계 1위 기업 자리를 차지했고, 올해 2분기 현재 하이닉스와 함께 세계 메모리 시장의 49.6%를 차지하며 패권(覇權)을 굳혔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메모리 반도체'에 국한된 이야기다. 메모리 시장보다 4배 이상 큰 비(非)메모리 시장에서 한국의 점유율은 2.3%에 머문다. 22%인 일본에 큰 격차로 뒤지고 있다.

중국은 한국이 장악한 메모리 분야는 아예 거들떠보지 않는다. 대신 대만과 선진국 기술을 흡수해 비메모리 분야에 역량을 집중한다. 비메모리 분야에서는 중국이 대만과 합칠 경우 한국을 압도한다. 시장 점유율이 우리의 2배가 넘는 5%다.

중국 반도체기업 설립 붐

한국 반도체산업협회에 등록된 국내 반도체업체 수는 330개. 중국은 '메이드인차이나닷컴'에 등록된 반도체 회사만 1188개다. 4배에 가까운 숫자만 무서운 것이 아니다. 지난달 30일 하루 동안에만 4개의 새로운 반도체 기업이 등록했다. '반도체 기업 설립 붐'이라 할 만하다. 이들 대부분이 비메모리 반도체와 관련된 업체다. 직원 수 20~50명 안팎의 반도체 설계를 전문으로 하는 '반도체 디자인' 회사도 1000개에 가깝다.

중국의 이런 반도체 기업 설립붐이 가능한 건 베이징대·칭화대 등 중국 일류 대학에서 매년 배출하는 연구 인력이 뒷받침한다. 중국의 과학기술 인력은 우리나라 전체 인구에 육박하는 4200만명. 전문 연구·개발 인력만 190만명에 달한다.

이민영 한국반도체산업협회 팀장은 "비메모리 분야에서는 다양한 역할을 하는 업체들 간에 협업이 중요하기 때문에 반도체기업 수가 많다는 것 자체가 곧 경쟁력"이라고 말했다.

하룻밤 자고 나면 우후죽순처럼 새로 생겨나는 중국의 반도체 기업은 중국 정부의 집중적인 투자와 지원을 배경으로 한다. 중국 정부는 내년부터 5년간 반도체산업에 250억달러(약 28조원)를 투자하기로 했다.

중국의 반도체 기술 수준도 급성장하고 있다. 지난 7월 세계 4대 반도체 학회 가운데 하나인 아시아반도체회로학회(A-SSCC)논문 심사가 열린 중국 베이징 크라운호텔. 중국 학자와 연구원은 이 심사에 58편의 논문을 제출했다. 그중 11편이 공식 논문으로 채택됐다. 2005년까지만 해도 중국에서 제출된 논문은 단 한 편도 없었다.

심사에 참석한 KAIST 전기전자공학과 조성환 교수는 "중국이 2~3년 전 제출한 논문은 우리나라의 대학생 졸업논문 수준이었다"면서 "그러나 올해 심사에 나온 논문은 한국과 일본에서 연구 중인 최신 기술까지 포함돼 있었다"고 말했다.

일본, 메모리에서 비메모리로 역량 이동

일본은 메모리에서는 우리에게 밀렸지만 비메모리에서는 르네사스일렉트로닉스·도시바·파나소닉·소니·후지쓰·히타치 같은 쟁쟁한 기업들이 버티고 있다. 일본 반도체 기업의 작년 전체 매출이 499억달러(55조7000억원)로 한국보다 두 배 이상 크다. 일본은 전체 반도체산업에서 한국에 뒤진 것이 아니다. 산업의 역량을 극심한 경기 부침을 겪는 메모리에서 안정적이고 부가가치가 높은 비메모리 시장으로 옮긴 것이다.

일본이 LCD TV 같은 대량 생산제품 분야에서는 한국에 뒤지지만 3D TV나 닌텐도 게임기, 로봇 등 창의적인 첨단 제품을 먼저 출시할 수 있는 것도 비메모리 반도체에서 쌓은 기술력이 뒷받침했다. 한국이 세계 1위인 LCD 패널을 구동하는 핵심칩도 일본산 비메모리 반도체이다.

비메모리 반도체는 반도체 설계 등 창의적인 기술 축적이 경쟁력의 관건이다. 단기간의 시설 투자로 인텔이나 미국의 텍사스인스트루먼트 같은 일류 기업을 따라잡기 힘들다. 축적된 기술장벽이 워낙 높기 때문이다.

비메모리 산업 육성을 위해서는 반도체 설계 인력 양성은 물론, TV·자동차 등 반도체를 쓰는 완성품 업체와 협업도 중요하다. 산업 전반적인 생태계 조성이 필요한 것이다. 자동차 제어용 반도체를 만든다면 설계 단계에서부터 자동차 업체와 협업을 해서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황창규 지식경제 R&D 전략기획단장은 "세계적인 전자 자동차 기업이 있는 한국은 비메모리 분야에서도 앞서갈 수 있는 기반이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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