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거래은행을 외환은행에서 다른 은행으로 바꾸는 방안을 검토하겠다. 외환은행에 대한 채무를 다 갚겠다."

현대그룹이 40년간 거래해온 외환은행에 화가 단단히 났습니다. 외환은행이 현대그룹과 재무구조개선약정을 체결해 구조조정을 추진키로 했는데, 이것이 규정을 기계적으로 적용해 나온 부당한 결정이라는 겁니다.

재무구조개선약정이란 부실 우려가 있는 대기업의 경영 정상화를 위해 채권단과 맺는 양해각서인데요. 자산매각 등의 구조조정 방안을 문서로 약속하는 것입니다.

현정은 회장이 이끄는 현대그룹은 현대증권을 빼면 현대상선이 그룹 매출의 78.6%를 차지합니다. 이번에 문제가 된 건 금융위기의 여파로 지난해 현대상선의 실적이 부진했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현대상선은 매출이 20%가량 감소해 8376억원의 적자를 냈고 부채비율이 284%를 넘었습니다.

현대그룹은 18일 낸 보도자료에서 "배를 늘려 적극적으로 영업할수록 채무가 늘어나는 해운업의 특수성을 외환은행이 너무 모른다"고 항의했습니다.

외환은행은 말을 아끼고 있습니다. 한 외환은행 관계자는 "재무약정을 통한 구조조정은 현대그룹에 도움이 되는 것인데 오해를 받고 있다"며 섭섭함을 토로했습니다.

그렇다면 주거래은행 변경이 단기간에 가능할까요. 외환은행은 물론 다른 현대그룹 채권은행들도, 그리고 금융당국도 현실성 없는 주장이라고 지적합니다. 현대그룹이 외환은행 채무를 한꺼번에 갚을 수 있다면 애당초 재무약정 대상에 거론되지도 않았을 겁니다. 다른 은행 돈을 빌려 외환은행과의 관계를 정리하는 것도 쉽지 않아 보입니다. 다른 은행 입장에서 보자면, 기업이 수시로 주거래은행을 바꾸겠다고 할 만한 선례(先例)를 남기는 것이어서 선뜻 나서기도 힘든 상황입니다.

외환은행과 현대그룹의 인연은 40년이 넘습니다. 지난 1967년 외환은행이 한국은행에서 분리돼 출범할 때부터 현대건설 등 현대그룹 계열사들이 주로 거래했습니다. 수출기업이 많았던 현대그룹의 특성상 외환은행과의 관계가 '찰떡궁합'이었지요.

서울 계동의 현대 사옥에 있는 외환은행 계동 지점에는 근무자가 20여명쯤 됩니다. 외환은행 기업금융부문 직원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은 점포입니다. 최근 서울 연지동으로 옮긴 현대그룹 사옥에도 외환은행 점포가 입점해 있습니다.

재무약정 때문에 현대상선의 영업에 차질이 빚어질 것이라는 현대그룹의 섭섭함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구조조정과 체질개선에 힘쓰자는 주거래은행의 고언(苦言)을 무시해서도 안 됩니다. 비 온 뒤에 땅이 더 굳어지듯, 현대그룹과 외환은행이 앞으로 더 건강한 신뢰 관계를 갖길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