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2일 경기도 고양시의 한 온실. 밖에는 한파가 몰아치고 있었지만, 온실 내부는 섭씨 18도로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야 할 정도로 따뜻했다. 온실에서 귀한 대접을 받고 자라는 것은 예쁜 꽃이나 과일나무가 아니라 온갖 잡초들이었다. 사람을 구할 신약 물질이 그 안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서울대 약대 부설 약초원 온실은 각종 신약을 낳을 토종(土種) 식물이 자라는 보고(寶庫)였다.

◆약초 캐러 다니는 약대 연구원

서울대 약대는 경기도 파주·고양·시흥 등 총 3곳에 약초원을 운영하고 있다. 고양 약초원에는 부지 약 4만㎡(1만2000평)에 1100종의 식물을 키우고 있다. 국내 식물이 총 3300종이니 3분의 1을 약초원이 키우고 있는 셈이다.

약초원 연구원에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풀·나무가 단순한 식물이 아닌 질병 치료의 원천이다. 서울대 약대에서는 해마다 2~3회씩 학생·연구원·교수 20여명이 지리산·덕유산·한라산 등을 훑는다. 심마니가 산삼을 찾듯이 약초가 될 수 있는 풀·나무를 캐기 위해서다. 차이가 있다면 산삼은 발견 즉시 돈이 되지만, 풀·나무가 약초가 될지는 추가 작업이 필요하다. 서울대 약대 양희정 연구원은 "채집 대상 식물들이 대부분 산등성이에 있어 그렇게 위험하지는 않다"며 "채집한 식물을 특수 비닐 백에 담아 3일 이내에 약초원에 배달한다"고 말했다.

경기도 고양에 있는 서울대 약초원 온실에서 연구원들이 약초들이 제대로 자라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 있다. 최근 토종 식물이 미래 신약의 원천으로 주목받고 있다.

약초원은 채집한 식물을 미리 개간한 땅에 뿌려 수를 불린다. 종자를 많이 확보하기 위해서다. 겨울의 한파를 이길 수 없는 풀·나무는 온실로 옮겨 새로운 봄을 맞도록 해 준다. 얼핏 보면 약초원이 하는 일은 농사와 비슷하다. 서울대 약대 김영중 교수는 "나무·풀을 약재로 바꾸는 일은 많은 시간과 땅이 필요하다"며 "바꿔 말하면 후발 주자가 단번에 선발 주자를 따라잡기 어려운 분야가 천연물 신약 개발이다"고 말했다.

◆치매 치료할 천연물 신약 개발 중

현재 서울대 약대는 국내 기업과 공동으로 국내 토종 식물에서 뽑아낸 물질로 치매 치료제를 개발하고 있다. 현재 환자 대상 임상 2상 시험을 하고 있다.

획기적인 치매 치료제를 내 놓는다면 타미플루 못지않은 매출을 올릴 수 있다. 신종플루 치료제인 타미플루 역시 원료를 자연에서 얻었다. 재일교포 과학자 김정은 박사가 미국에서 개발한 타미플루는 중국산 스타아니스라는 나무에서 채취한 원료를 바탕으로 개발했다.

천연물 신약 과정은 식물에서 약효가 있는 물질을 추출하는 작업에서부터 시작된다. 산과 들의 평범한 나무·풀이 약초가 되려면 질병을 치료하는 효능이 있는지를 알아내야 한다. 이때 조상의 지혜를 빌리기도 한다. 서울대 약대 성상현 교수는 "중국의 본초강목, 우리의 동의보감은 천연물 신약 개발의 보고"라며 "약효를 가진 물질을 어떤 풀·나무에서 얻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중요한 기초 자료가 된다"고 말했다.

신약 개발에서 임상시험은 성별·인종에 상관없이 신약을 복용해도 안전한지를 검증하는 작업이다. 이런 점에서 과거 선조가 풀·나무에서 채취한 물질의 효능을 일정 정도 검증했다는 점도 임상시험의 부담을 덜어 준다.

또한 자연에 없는 물질을 인위적으로 만든 합성 신약보다 자연의 풀·나무에서 채취한 원료로 제조되는 천연물 신약이 인체에 더 적합하다.

이런 안전성 차이는 개발 비용의 절감으로 이어진다. 합성 신약은 임상에서 시판 승인되기까지 평균 11년 6개월이 걸리고, 2000여억원이 투자된다. 천연물 신약 투자비는 60억~100억원 정도. 여기에 개발 기간까지 7년 7개월에서 10년 1개월로 합성 신약에 비해 짧다.

◆세계 각국에서 천연물 신약 개발 경쟁

천연물 신약은 적은 투자비로 많은 성과를 거둘 수 있는 지름길이다. 독일·미국·중국 등 세계 각국이 앞다퉈 천연물 신약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성상현 교수는 "국제보건기구(WHO)에 따르면 천연물 의약품 시장은 600억 달러(약 66조원) 이상이며, 매년 평균 15% 이상 성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천연물 의약품이 성장하기 위해 해결해야 할 최대 난관은 안정적인 원료 공급이다. 풀이나 꽃에서 원료를 추출하다 보니 대량으로 생산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생산 확대를 위해 공장 세우듯이 전국 곳곳에서 재배할 수도 있지만, 이러면 원래 얻었던 약효가 나오지 않는다. 심지어 같은 지역에서도 기후에 따라서 약효가 달라진다.

그러다보니 땅값과 인건비가 싼 해외로 재배 지역을 확대하는 것도 매우 어려운 일이다. 천연물 신약이 자연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이 임상 시험 검증에는 강점으로 작용하지만, 대량 생산에는 약점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김영중 교수는 "천연물 약품의 단점을 해소하기 위해 약초원은 수확시기, 비료, 토양 성분을 달리하면서 최적의 약효를 발휘할 수 있는 조건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