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낮 12시쯤 조선왕조 제일의 법궁인 경복궁 남측 담장 바로 앞으로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윤석열 대통령 탄핵 촉구 집회에 참여하려 걸어가고 있었다. 어떤 참가자가 든 깃발은 담장 위 기와가 닿을 듯했다. 한 남성은 담장을 발로 차기도 했다.
옆에서는 ‘윤석열 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 지도부가 천막을 치고 단식 농성을 벌이고 있었다. 단식 농성장은 2023년 12월 ‘낙서 테러’가 있었던 곳에서 불과 5m 정도 떨어져 있다. 한복을 빌려 입은 외국인 관광객들은 농성 천막 때문에 좁아진 보도 위를 의아한 표정을 한 채 지나갔다.
◇경복궁 담장 따라 180m에 집회 천막 설치… 과거 집회 때문에 담 훼손되기도
탄핵 촉구 집회 개최 장소는 작년 12월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뒤 여의도에서 경복궁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뒤 연일 집회가 벌어지면서 국가유산청은 집회로 경복궁이 훼손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실제 과거 집회 때문에 궁궐이 훼손된 적도 있다. 2008년 6월 열린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 시위 때 경복궁 서쪽 담 일부와 기와가 훼손돼 긴급 보수했다. 2013년에는 덕수궁 대한문 앞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천막 농성장에서 화재가 발생해 담장이 불에 그을렸다.
경복궁 앞 집회는 최근 규모가 더 커졌다. 14일 경찰에 따르면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은 전날 오후 4시에 국회를 출발해 8.7㎞를 행진한 뒤 고궁박물관 남측 경복궁 담장 바깥 쪽에 모였다. 경찰에 신고한 집회 인원은 500명이다. 그런데 집회가 끝나더라도 현장은 정리되지 않는다. 비상행동 지도부가 지난 8일 윤 대통령 탄핵심판 인용을 촉구하며 단식에 들어가면서 24시간 유지되는 천막이 설치됐다. 김경수 전 경남지사도 하루 뒤 단식을 시작하며 천막을 쳤다.
이곳에 설치된 천막은 처음엔 5개 정도였지만 민주당이 경복궁 앞에서 집회를 열며 확 늘었다. 전날 낮 12시쯤에는 경복궁 서십자각터부터 광화문 월대 앞까지 약 180m에 걸쳐 조국혁신당, 서울의소리, 향린교회 등 다양한 단체의 천막 34개가 설치돼 있었다.
민주노총이 집회를 연 지난 11일 낮에는 일부 시위대가 경복궁 담장에 기대어 앉아 있기도 했다. 국가유산청이 내놓은 대책은 바리케이트나 사람들을 줄을 서도록 유도하는 용도인 벨트차단봉을 담장과 월대 앞에 놓는 것이다. 지난 12일 저녁 열린 탄핵 촉구 집회 참가자들은 통제된 구역 안쪽으로는 들어가지 않았지만, 여전히 경복궁 왼편과 오른편 통제되지 않은 곳에서는 담장에 기대는 모습이 보였다.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관계자는 “사람이 많이 몰리면 담장 훼손 가능성이 커진다”며 “바리케이트와 벨트차단봉에서 한 발짝만 안으로 들어가도 훼손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집회 때문에 경복궁에 바리케이트가 쳐지면서 외국인 관광객들은 ‘인증샷’을 찍는 데 불편을 겪고 있다. 지난 11일 낮 12시쯤 한 외국인 남성은 월대 밖에 쳐진 바리케이트 앞에서 광화문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관광객 아니카 폰드리오(23)씨는 “네덜란드에서는 정말 큰일이 있을 때만 경찰이 배치되는데 경복궁 주변에 수십 명의 경찰이 배치돼 있더라. ‘우리가 오면 안 되는 곳에 온 건가’ 생각했다”고 말했다.
경복궁뿐만 아니라 헌법재판소 인근 창덕궁·창경궁, 서울시청 인근 덕수궁 4대 궁능유적지도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연일 이어지는 집회로 피해를 본 것으로 보인다. 국가유산청의 집계에 따르면 궁궐 4곳의 작년 12월 관람객은 전달보다 53% 감소했다. 2023년 12월 관람객이 전달보다 40% 감소한 것과 비교하면 겨울인 점을 감안하더라도 집회 영향이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헌법재판소 앞에서는 작년 12월부터 윤 대통령 탄핵 찬성·반대 집회가 열렸는데, 창덕궁은 헌재에서 불과 500m쯤 떨어져 있다.
◇한남동 관저 앞 집회 재개되자 한남초 학부모들 걱정… “아이 지나가는데 확성기로 욕설”
서울 용산구 한남동 관저 앞에서는 윤 대통령이 석방돼 관저로 돌아온 뒤 탄핵 반대 집회가 재개됐다. 이 때문에 관저 바로 옆인 한남초등학교 앞 한남대로에서 집회가 열려 학부모들이 자녀들의 등하굣길 안전을 우려하고 있다.
한남동 탄핵 반대 집회는 법원이 윤 대통령 구속 취소 결정을 내린 지난 7일부터 재개됐다. 지난 11일에는 자유통일당이 윤 대통령 체포 56일 만에 평일 집회를 열었다.
학부모들은 자녀 안전을 우려해 직장에 양해를 구하고 자녀 등하굣길을 함께 하고 있다. 지난 11일 한남초 앞에서 만난 주민희(38)씨는 “남편도 저도 일하는데 어떻게든 시간을 내서 초등학교 2학년 아이 등하굣길을 챙기기로 했다”며 “아이가 겨울방학 때 밖에서 놀다 들어왔는데 손에 탄핵 집회 피켓이 들려 있었다. 너무 화가 나고 무서웠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3학년 아들을 데리러 온 이광규(40)씨는 “집회 참석자들이 시끄럽게 노래 틀고 확성기로 욕하는 걸 아이가 지나가다가 직접 듣기도 했다”며 “집회가 끝날 때까지는 좀 무리해서라도 매일 챙기려 한다”고 말했다.
용산구청 관계자는 “당분간 혼자 하교하면서 볼보빌딩과 같은 위험지역을 지나가는 학생들은 어른 자원봉사자가 하굣길에 동행할 예정”이라며 “아직 단축수업 등을 계획하고 있지는 않지만, 상황을 예의주시 중”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