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리반도체 공장의 모습. 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련 없음. /조선DB

국내 반도체 공정 최고 권위자, 반도체 수율(생산품 대비 정상품 비율)의 달인, 반도체 업계의 전설...

12일 삼성전자의 반도체 공장 설계 자료를 중국에 빼돌린 혐의로 검찰에 기소된 최모(65)씨에게 따라붙던 수식어들이다. 국내 반도체 기술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던 그가 이제는 기술을 해외에 유출시킨 ‘매국노’라는 꼬리표가 달린 채 법정에 서게 됐다.

최씨는 어떻게 국내 반도체 업계의 ‘영웅’에서 ‘산업 스파이’로 전락하게 됐을까.

◇이건희 회장도 분노하게 만든 ‘하이닉스의 구원투수’

최씨는 1984년 삼성전자 반도체사업부에서 커리어를 시작했다. 18년 간 메모리반도체 사업부에서만 일하며 기술 대상을 세 차례나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에서 18년을 일하며 메모리사업부 상무까지 지냈던 그는 2001년 9월 삼성전자를 퇴사하고 두달 후인 11월 유동성 위기로 채권단의 관리를 받고 있던 하이닉스반도체(현 SK하이닉스)로 이직했다.

당시 하이닉스의 기술은 삼성전자에 비해 현저히 뒤떨어진 상태였다. 최씨는 개별 공정 별로 장비를 개선하고, 공정 과정을 재편해 하이닉스의 역량을 크게 끌어올렸다. 주 채권 은행인 외환은행 부행장을 설득해 매각을 막는데도 기여했다. 그 결과 워크아웃으로 투자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던 하이닉스는 회생의 길로 돌아서게 됐다. 그야말로 회사의 ‘구원투수’였던 셈이다.

2007년 하이닉스는 삼성전자보다 먼저 80나노 공정에 돌입하는 데 성공했다. 삼성전자의 수율·제조원가가 일시적으로 하이닉스에 뒤처졌다는 보고를 받은 고(故) 이건희 회장이 최씨를 거론하며 자사 반도체 부문을 강하게 질책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이 무렵부터 최씨에겐 ‘반도체 수율의 달인’이라는 말이 따라붙기 시작했다.

이런 업적으로 하이닉스 최고기술책임자(CTO)까지 올랐고 하이닉스 사장 후보군에도 이름을 올렸지만, 결과적으로는 하이닉스에서 부사장직을 마지막으로 최씨는 2010년 4월 하이닉스를 퇴사했다. 이후 STX솔라(현 E&R솔라)와 한화큐셀 사장을 거쳐 2015년 돌연 대만으로 떠났다. 한화에 둥지를 튼 지 9개월 만의 일이었다.

최씨는 이 즈음 본격적으로 해외 사업 쪽에 눈을 돌렸다. 싱가포르에 ‘진세미’를 설립하고 메모리 반도체 기업들을 대상으로 생산량 증대 컨설팅 사업을 했다. 반도체 업계에서 쌓은 대단한 명성 때문이었을까. 여러 업체들이 진세미에 컨설팅을 문의했다. 그러던 중 대만의 세계적인 전자기기 업체 폭스콘이 접촉해왔다. 폭스콘은 2018년 8월 진세미에 8조원을 투자하기로 계약했다. 실제로 폭스콘은 1년 간 매달 70억~80억원을 인건비 등의 명목으로 진세미에 지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것이 최씨의 일생에 일종의 분기점이 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반도체 굴기 내세운 중국, 국내 반도체 기술자 영입

법조계에 따르면, 검찰은 최씨가 폭스콘의 투자 유치를 협의했던 때부터 이미 범행을 계획하기 시작한 게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최씨는 폭스콘의 머리글자를 딴 ‘에프(F)프로젝트’에 착수했다. 중국에 삼성전자의 ‘복제 공장’을 짓겠다는 무서운 계획이었다.

삼성전자의 반도체 공장을 ‘복붙(복사 후 붙여넣기)’하기로 마음 먹은 최씨는 공장 설계 도면과 BED(Basic Engineering Data·반도체 제조가 이뤄지는 클린룸을 불순물이 거의 없는 최적의 공간으로 만들기 위한 환경 조건), 반도체 생산을 위한 8대 공정 배치도를 탈취한 혐의를 받고 있다. 삼성전자에서 30여년 간 쌓아올린 자산이다. 검찰은 “이 영업비밀이 국가핵심기술에 해당되며 최소 3000억원에서 최대 수조원의 가치를 지녔다”고 추산했다.

최씨가 중국에 기술을 빼돌리기로 작심한 결정적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가 계속 범행을 부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 측이 제시한 금전적 보상이 계기가 됐을 거라는 추정이 나온다. 중국은 2015년 무렵부터 ‘반도체 굴기’를 내세우며 승진에서 누락되거나 퇴직한 국내 반도체 전문가들을 고액 연봉으로 영입해 갔다. 현지 사정에 정통한 한 익명의 관계자는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 반도체 핵심 인력 영입에 혈안된 중국이 국내 기술자들에게 거의 백지수표에 가까운 금액을 제시하기도 한다”고 밝혔다.

폭스콘과 8조원대 계약을 체결하기 이전에도 최씨는 중국에 기술과 인력을 빼돌린다는 루머에 휩싸인 적이 있다. 그는 2017년 11월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루머의 진위를 묻는 기자에게 “문서 하나, 민감한 영업 정보 하나라도 여기에 들고 왔으면 한국 회사·정부가 가만히 있었겠는가. 기술 유출은 터무니없는 주장이다”라고 밝힌 바 있다.

◇대만 폭스콘 자금 지원 중단에 공장 건설도 무산

복제 공장은 중국 산시성 시안(西安)에 건설될 예정이었다. 공장 부지는 대담하게도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불과 1.5km 떨어진 곳이었다. 검찰은 이 모든 과정이 2018년 8월 폭스콘과 투자 계약을 체결한 뒤 6~7개월 만에 속전속결로 이뤄졌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중국 정부와 대만 기업의 아낌 없는 지원을 받으며 탄탄대로를 걷던 최씨의 원대한 계획은 결국 완성되지 못했다. 폭스콘에서 돌연 자금 지원을 중단했기 때문이다. 폭스콘의 모기업이자, ‘대만의 삼성’으로 불리는 홍하이그룹의 궈타이밍 회장은 평소 혐한 성향으로 유명하다. “일본 기업(샤프)과 손잡고 3~5년 안에 삼성전자를 꺾겠다” “배신자 삼성전자를 꺾는 게 내 인생의 목표다”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폭스콘이 지원을 철회한 정확한 이유는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으며, 설계도면까지 완성하고 건설만 앞뒀던 최씨의 복제 공장은 그렇게 빛을 보지 못하고 계획으로만 남았다.

최씨는 2017년 기술 유출의 진위를 묻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 메모리 기술자가 중국에 가 봤자 팽 당하고 돈도 못 번다”며 의혹을 부인했었는데, 이 말은 본인의 미래를 예언한 게 되어버린 셈이다.

◇국정원 제보로 조사 시작한 검찰, 병원 가려 입국한 최씨 덜미

최씨의 범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중국 청두(成都)시에서 4600억원을 투자 받아 세운 합작법인을 통해 반도체 연구개발동을 만들었다. 반도체 대량 양산 전 시제품을 만드는 곳이었다. 올해 시제품 생산에 성공한 만큼, 공장 건설까지 가능했다면 우리 반도체 산업에 회복 불가능한 손해가 발생할 수 있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검찰은 중국 시안에 복제 공장 설립 프로젝트가 한창 진행 중이던 2019년 8월 국정원으로부터 해당 첩보를 입수했으나 최씨의 중국 체류 등으로 한동안 수사를 진행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최씨가 올해 2월 병원에 가기 위해 입국했고, 검찰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그를 형사입건했다. 구속부터 기소까지 넉달 만에 속전속결로 이뤄졌다.

평소 최씨를 잘 알던 사람들은 그가 이런 무리한 범행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다는 반응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최씨에 대해 “압도적인 권위자이며 엄청난 카리스마와 이루 말할 수 없는 꼼꼼함을 지닌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도표까지 싸 들고 채권단을 찾아가 열정적으로 설명하던 SK하이닉스 시절과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만 달라진 건 그의 마음이었다.

검찰 관계자는 “단순히 반도체 기술 유출이 아닌, 반도체 공장을 통째로 복제 건설하려 한 범행”이라며 “반도체 생산 경쟁이 치열해지는 상황에서 국내 반도체 산업 근간을 흔드는 중대 범행에 대해 엄정하게 대응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