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프로게임단 한화생명e스포츠가 올해 처음으로 열린 리그 오브 레전드(LoL·롤) 국제 대회 ‘퍼스트 스탠드’에서 첫 우승 팀의 영예를 거머쥐었다. 한화생명은 지난 16일 서울 종로구 롤파크에서 열린 2025 퍼스트 스탠드 결승전에서 유럽 팀 카르민 코프(KC)를 3 대1로 꺾고 우승컵을 들었다.
퍼스트스탠드는 중국·북미 등 전 세계 5대 리그 우승팀이 모여 개최한 대회다. 한화생명의 우승은 국내 리그가 세계 최정상임을 증명한 것이다. 국내 선수의 실력만큼이나 전 세계 엔터·스포츠 업계가 국내 롤 프로리그(LCK)에 놀라는 점은 또 있다. 고액 연봉을 받는 20대 남자 프로게이머 집단에서 사건·사고가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해외 리그 관계자는 “한국 프로게이머는 단정한 외모에 술·담배도 거의 하지 않고 비속어도 잘 쓰지 않는 모범생 이미지가 강하다”고 말했다.
MZ세대 남자들의 우상인 프로게이머들은 대부분 10대 중반에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연습생을 시작해 10대 후반에 데뷔한다. 현재 1군에서 가장 어린 선수는 2007년생이다. 프로게이머로 성공한다면 20대 초반에 수억 원에서 수십억 원의 연봉을 받는다. 국내 e스포츠 업계에 따르면, 롤 선수들의 평균 연봉은 7억원, S급 선수들의 연봉은 수십억 원대다.
국내 LCK 관계자들은 그 비결로 “10년 넘게 뛰고 있는 고참 3명이 모범이 됐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 세 선수는 T1의 ‘페이커’ 이상혁(29), KT롤스터에 있다가 최근 군 복무를 앞두고 있는 ‘데프트’ 김혁규(29), 그리고 한화생명 소속으로 퍼스트 스탠드 우승을 한 ‘피넛’ 한왕호(27)다.
◇모범이 되는 ‘아버지 리더십’ 페이커
e스포츠의 월드컵으로 불리는 월드 챔피언십(롤드컵)에서 5번 우승하며 우상이 된 페이커는 강한 승부욕과 자기 관리로 묵직한 아버지 같은 리더십을 발휘한다. 그는 프로게이머 중 가장 많은 70억원 안팎의 연봉을 받지만, 사치를 하거나 술·담배를 즐기지 않는다. 오히려 책을 즐겨 읽고, 명상을 한다. 교보문고에 ‘페이커 추천 도서’ 코너가 있을 정도다. 그는 과거 인터뷰에서 “내 행동이 후배와 팬들에게 많은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더욱 조심스럽게 행동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후배 선수들이 인터넷 방송에서 비속어를 쓰면 따끔하게 혼을 내기도 한다.
그의 가족들도 ‘수퍼스타 가족이 보여야 할 모범의 정석’을 보여준다. 공개 석상에 잘 나타나지 않는 가족들은 지난해 6월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페이커 선수의 ‘전설의 전당’ 행사에도 “부담스럽다”며 불참했다. 대신 집을 후배 동료들이 마음껏 놀 수 있는 공간으로 꾸몄다. 한 구단 관계자는 “선수들이 쉬는 날 가장 가고 싶어 하는 곳은 화려한 술집이 아닌 페이커의 집”이라며 “10~20대에는 친구나 선배의 영향을 많이 받는데 가장 잘나가는 페이커 선수가 바른 생활을 하다 보니 선수들의 분위기도 비슷해진다”고 말했다.
◇어머니처럼 ‘따뜻한 선배’ 데프트
2022년 롤드컵 우승으로 ‘중꺾마(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라는 단어를 유행시킨 데프트는 어린 후배들을 다독이는 어머니 같은 리더십으로 유명하다. 한 팀에만 있었던 페이커와 달리 여러 팀을 옮겨 다닌 데프트는 재정이 불안정해 공중분해되는 팀과 성숙하지 못한 코치진 때문에 힘들어하는 후배들을 다독이는 역할을 도맡았다.
해외 원정 경기에서 그의 숙소는 한국 선수들의 사랑방이다. 데프트는 외국 음식에 적응하지 못하는 선수들을 위해 라면을 끓여주며 컨디션을 챙겼다. 코로나 시기에는 갈 곳 없는 후배들이 그의 숙소로 모여들자 4인 금지 원칙에 따라 자신이 집 밖으로 나갔다. 이런 그의 리더십에 지난해 11월 군 입대를 앞두고 열린 송별회에는 1000여 명의 팬과 수십 명의 후배가 함께했다. ‘스코어’ 고동빈 선수는 “데프트는 어리광을 부리기보다 남보다 많은 시간을 연습에 쏟아부었고 항상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선수였다”며 “그는 뛰어난 선수를 넘어 훌륭한 리더로 성장했다”고 말했다.
◇희생해 키우는 ‘대치맘 리더십’ 피넛
피넛은 10번이 넘는 국내외 우승으로 ‘우승 청부사’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게임에서는 자원을 많이 먹고, 상대를 이기는 선수가 돋보이지만, 그는 자신을 희생하더라도 후배들이 더 빛나며 승리할 수 있도록 이끈다. 이 모습이 대치동 학부모 같다고 해서 ‘대치맘 리더십’으로 불린다. 우승 트로피를 들 때도 그는 후배들이 먼저 들도록 배려한다. 오랜 기간 기복 없이 꾸준한 기량으로 후배들의 모범이 되기도 했다.
한화생명의 전신인 락스 타이거즈의 막내로 시작한 그는 “형들에게 좋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그 영향을 후배에게 베풀고 싶다”고 말한 바 있다. 락스 시절 그의 동료 형들은 프로게임단 초기 적은 월급으로도 피넛이 먹고 싶다는 건 대부분 사줄 정도로 그를 아꼈다. 대부분이 일찍 선수 생활을 끝냈지만 피넛이 스타 선수로 성장해 나갈 때는 그 누구보다도 뿌듯해했다.
올해로 13년 된 LCK는 매년 규모가 커져 올해는 포스코, 우리은행, 벤츠 등이 후원하고 있다. 라이엇코리아 관계자는 “만약 이 세 명의 선수가 사건·사고로 점철된 삶을 살았다면 후원사도, 게임단을 믿고 자식들을 보낼 부모도 없었을 것”이라며 “이 고참 선배들 덕에 업계 후배들도 건강한 듯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