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 당국이 국내 주식시장에서 ‘한계기업’ 퇴출을 강화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가운데 올해 들어 부실 기업의 상장폐지가 잇따르고 있다. 한국거래소는 지난 14일 경영진의 횡령·배임 혐의가 제기되며 주식 거래가 정지된 이그룹(옛 이화그룹) 계열사 3곳(이아이디·이화전기·이트론)을 한꺼번에 상장폐지하기로 결정했다.
한국거래소는 지난 14일 이아이디, 이화전기, 이트론에 대해 최종 상장폐지를 결정했다. 회사가 가처분 신청을 하지 않는다면 세 회사 모두 정리매매를 거친 뒤 증시에서 퇴출된다.
이들 상장사는 검찰이 김영전 전 이그룹 회장에 횡령·배임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하면서 지난 2023년 5월 거래가 정지됐다. 한국거래소 규정에 따르면 상장적격성 실질심사 개시 사유가 되는 횡령·배임의 규모는 ‘임원의 경우 자기자본의 100분의 3 이상이거나 횡령·배임금액이 10억 원 이상인 경우’다.
이그룹 측은 김 전 회장의 횡령 금액이 상장적격성 실질심사 대상 기준인 10억원 미만이라고 주장했지만 검찰 공소장에서 김 전 회장의 횡령·배임 혐의 금액이 700억원대에 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한국거래소가 이들 회사에 대해 상장 실질 심사를 시작한 것은 경영진의 횡령·배임 혐의 때문이다. 그런데 심사를 위해 경영 상태를 포괄적으로 검토하는 과정에서 상장을 유지하기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거래소 관계자는 “해당 상장사의 경영상 투명성 등 기업으로서 계속 영업이 가능한지 등 다양한 부분을 살펴봤는데, 심사 결과 상장 유지에 의미가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라고 설명했다. 거래소의 질적 평가가 이번 상장폐지 결정에 상당한 영향을 줬다는 의미다.
최근 금융 당국은 국내 주식시장에서 부실·한계기업을 퇴출해 시장 건전성을 높이고 투자자 신뢰를 높이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를 위해 최근 거래소는 상장폐지 요건 강화, 관련 절차 효율화 및 투자자 보호장치 보완에 나섰다.
정은보 한국거래소 이사장은 신년간담회에서 “상장폐지가 되면 정리매매라든지 이런 단계를 걸쳐 최종적으로 폐지가 완료되는데 오히려 상장폐지해야 할 기업이 계속 시장에 남아 새로운 투자자들이 불공정한 거래에 희생되게 할 순 없다”며 “기업이 망한다는 것과 상장폐지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고 했었다.
이그룹 계열사를 한꺼번에 상장폐지하기로 한 결정은 최근 이런 기조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거래소에 따르면 올해 1월 1일부터 이날까지 상장폐지가 결정된 기업은 총 6개다. 유가증권시장에 상장된 이아이디를 비롯해 코스닥시장에서는 ▲조광ILI ▲대유 ▲광림 ▲이트론 ▲이화전기 등이 상장폐지가 결정됐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하면 훨씬 많은 수의 기업이 상장폐지 결정된 것이다. 지난해 1월 1일부터 2월 17일까지 상장폐지가 결정된 기업은 코스닥시장에 상장된 비디아이 한 곳뿐이었다. 한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최근 한국거래소의 상장폐지 결정이 단호해진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한편 이화그룹 소액주주 연대는 이번 상장폐지 결정에 대해 한국거래소의 책임도 있다며 대응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소액주주 연대는 “한국거래소의 부실한 검증과 관리 책임 소홀로 수십만 개인 투자자가 피해를 입었다”며 “문제의 핵심은 한국거래소가 기업의 허위 공시를 제대로 검증하지 않고 거래 재개 결정했다는 점”이라고 했다. 이어 “주주연대는 한국거래소의 책임을 묻고 제도 개선을 요구하는 강력한 대응에 나설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이화전기와 이트론은 이날 서울남부지방법원에 상장폐지 결정 효력정지 가처분을 신청했다고 공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