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주요 은행에서 주택담보대출과 전세자금대출을 받은 차주(돈 빌린 사람)의 평균 신용점수가 나란히 940점 안팎까지 오른 것으로 나타났다. 1년 전과 비교해 10점 이상 오른 수치다. 은행이 금융 당국의 가계부채 관리 강화 기조에 맞춰 신용점수 커트라인을 올린 데다, ‘신용 인플레이션’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된다. 높아진 대출 문턱에 갈 곳 없어진 중·저신용자들이 2금융권 너머로 밀려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14일 은행연합회에 따르면 올해 1월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 등 5대 은행에서 분할 상환 주담대를 받은 차주의 평균 신용점수는 940점(신용평가사 KCB 기준)으로 집계됐다. 한 달 전인 지난해 12월엔 평균 신용점수가 947점까지 올랐다. 2021년 없어진 신용등급(1~10등급)을 기준으로 하면 942점부터가 1등급에 해당하는데, 은행에서 돈을 빌린 신규 대출자 대다수가 최상위 등급의 고신용자라는 얘기다.
평균 신용점수는 지난 2년간 가파르게 올랐다. 5대 은행의 주담대 평균 신용점수는 2022년 12월 909점에서 2023년 12월 930점으로 오른 뒤 940점대까지 뛰었다. 2년 동안 평균 신용점수는 38점 올랐다. 전세대출도 마찬가지다. 5대 은행의 전세대출 평균 신용점수는 2023년 12월 920점에서 2024년 12월 937점으로 17점 올랐다. 2022년엔 전세대출 공시가 이뤄지지 않았다. 개인 신용대출 평균 점수도 903점→923점→925점으로 같은 기간 20점 이상 올랐다.
중·저신용자에게 대출 공급을 확대하기 위해 설립된 인터넷전문은행은 시중은행보다 문턱이 더 높았다. 지난 1월 말 기준 인터넷은행 카카오·케이뱅크가 취급한 주담대의 평균 신용점수는 968점이었다. 토스뱅크를 포함한 3사의 전세대출 평균 신용점수는 942점이었다. 이는 시중은행보다 20점가량 높은 수준이다.
은행이 가계대출 총량 관리를 위해 대출금리를 높이고 신규 대출을 제한하자, 신용등급이 상대적으로 높은 차주부터 대출을 받아 평균 점수가 오른 것으로 분석된다. ‘신용점수 관리 서비스’가 잇달아 출시되면서 신용 관리가 과거에 비해 수월해진 점도 영향을 미쳤다. 토스 등 핀테크 업체는 차주가 신용점수를 쉽게 올릴 수 있도록 공과금, 통신비 납부 내역 등의 서류를 신용평가사에 대신 제출해 주는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다. 이밖에 대출, 카드 사용 내역을 바탕으로 맞춤형 신용점수 관리 방안을 제시하기도 한다.
KCB에 따르면 950점 이상 초고신용자는 2023년 말 기준 1314만 6532명에 달한다. 전체 개인(4953만3733명)의 26%가량이다. 초고신용자는 2019년 말 906만6974명에서 2021년 1000만명을 돌파한 후 빠르게 늘어나는 추세다. 900점 이상인 차주는 2149만3046명으로 절반에 달한다.
이러한 신용 인플레이션으로 신용점수의 변별력이 낮아지면 중·저신용자 대출 공급이 줄어드는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신용점수가 높은 사람이 과반이 돼 자금이 고신용자에게로 쏠리면, 900점 초반대 신용자부터 줄줄이 밀려 중·저신용자는 2금융권, 대부업권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쏠림 현상을 막기 위해 은행들은 속속 대안 신용평가 시스템을 도입하고 있다. 금융 정보뿐 아니라 쇼핑 이용 내역이나 통신비 납부 내역 등 비금융 정보를 신용평가에 활용하는 방식이다. 신한은행과 농협은행은 대출 심사에 ‘네이버페이 스코어’를 적용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네이버페이 스코어는 네이버페이와 NICE평가정보가 함께 개발한 개인 신용평가 모델로, 비금융 정보를 활용하는 것이 특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