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년(乙巳年) 새해 들어 국내 금융투자업계 유관기관 수장들이 가상자산 상장지수펀드(ETF) 도입의 필요성을 잇달아 언급했다. 가상자산 시장의 폭발적인 성장세를 감안하더라도 금융당국이 다소 부정적인 시각을 유지하는 상황에서 한국거래소·금융투자협회 등이 다른 목소리를 내며 여론 조성에 나선 건 이례적이다. 시장에선 조기 대선까지 염두에 둔 사업자들의 사전 포석이란 해석이 나온다.

윤석열 대통령이 국민의힘 대선 후보 시절이던 2022년 1월 19일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가상자산 개미투자자 안심투자 정책공약'을 발표하고 있다. / 뉴스1

◇ 탄핵 이후 상황까지 염두?

15일 금융당국과 금융투자업계 등에 따르면 금융위원회는 이달 8일 발표한 ‘2025년 주요 업무 추진계획’에 가상자산 ETF 도입에 관한 내용을 넣지 않았다. 올해 업무보고에 담긴 가상자산 관련 계획은 법인의 거래소 실명계좌 발급 단계적 허용 검토, 가상자산 사업자의 대주주 적격성 심사제 도입 등이 전부다. 금융당국은 가상자산 ETF가 금융시장 안정성과 실물경제 생산성에 미칠 부정적 영향을 우려하고 있다.

당국 기조와 달리 업계에서는 “우리도 가상자산 ETF를 서둘러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리더 입을 통해 나오고 있다. 정은보 한국거래소 이사장은 신년사에서 “가상자산 ETF 등 신규 사업에 대한 해외 사례를 잘 벤치마킹해 자본시장의 새로운 영역을 모색해 나가겠다”고 했다. 서유석 금융투자협회장 역시 신년사를 통해 “가상자산 ETF 등 금융투자회사의 비즈니스 확대를 추진해 디지털 자산시장이 우리 자본시장의 미래성장동력이 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고 했다.

금융위 고위 관계자는 “업계 니즈를 대변하는 입장에선 할 수 있는 말”이라고 했다. 그러나 일반 증권사나 자산운용사 대표도 아닌 자본시장 유관기관장이 금융당국 기조와 확연히 다른 목소리를 내는 건 이례적이다. 통상 거래소나 금투협 수장은 법 개정이 필요한 사안과 관련해선 당국과 사전 교감한 다음 공개 석상에서 발언한다. 그간 정부가 부정적인 태도를 보여온 사안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이렇다 보니 업계 관계자 사이에선 “조기 대선 상황을 염두에 둔 포석”이란 평가가 나온다. 금융투자업계 한 관계자는 “야당 뜻대로 윤석열 대통령이 탄핵당해 조기 대선 레이스가 시작될 경우 각 진영 대선 후보는 표심을 얻고자 가상자산 ETF 도입을 공약으로 내걸 수 있다”며 “정치적으로 민감한 시기인 만큼 대놓고 인정하진 않겠지만, 여러 시나리오를 고려했을 것”이라고 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탄핵 시도가 불발되더라도 투자업계로선 한 번 질러보기에 나쁘지 않은 여건”이라며 “그만큼 금융당국의 금융투자업계 통제력, 더 넓게 보면 현 정부의 입김이 약해졌다는 증거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래픽=정서희

◇ 당국은 금융시장 안정성·실물경제 생산성 우려

금융투자업계 유관기관 수장들이 여론몰이에 나설 정도로 해외 가상자산 ETF의 성장 속도는 예사롭지 않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작년 초 비트코인·이더리움 현물 ETF 상장을 허용했다. 이 가운데 비트코인 현물 ETF의 순자산총액(AUM)은 200조원 규모로 불어났다. 등장 1년 만에 대표적 전통자산인 금(金) ETF를 넘어선 것이다. 시장 참여자들이 “한국도 관련 ETF 도입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배경이다.

자본시장법에 따르면 ETF의 기초자산은 금융투자 상품, 국내외 통화, 농산물·축산물·수산물·임산물·광산물·에너지 등 일반 상품이다. 이 명단에 가상자산을 넣으려면 법을 개정해야 한다. 하지만 정부가 이 작업에 서둘러 나설지는 미지수다. 가상자산 현물 ETF가 등장하면 주식시장 유동성이 빠져나갈 가능성이 있어서다. 이는 밸류업(가치 제고) 정책 기조에 배치된다.

비트코인 현물 ETF에 대한 금융당국의 우려는 자본시장연구원이 발간한 ‘가상자산 현물 ETF의 리스크’ 보고서 내용과 같은 맥락이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기업이 주식·회사채 등 유가증권을 발행해 조달한 자금은 투자·연구개발(R&D) 등에 활용되면서 실물경제에 기여할 수 있지만, 가상자산은 채굴이나 발행을 통해 산출하는 경제적 편익이 불분명하다.

또 가상자산 시장의 높은 변동성은 금융 시스템 전반의 불안으로 전이될 수 있다. 예컨대 가상자산 가격 급락으로 ETF 환매가 급증하면 가상자산 현물의 대량 매도가 발생하고, 이는 다시 가격 추가 하락을 부추길 수 있다. 장보성 자본연 연구위원은 “이 과정에서 유동성 공급자(LP)의 헤지(hedge·위험 회피) 실패로 시장 패닉이 발생하거나 LP가 대규모 손실과 유동성 부족을 겪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