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O 호프를 찾아서 (1)-22연승 신화의 원년 최고 스타 박철순 해설위원(2편)

2027년이면 한국야구 명예의 전당이 들어설 야구박물관이 탄생할 전망이다. 그동안 말이 많았던 야구박물관이 부산 기장군에 올 여름 착공 예정으로 2027년 개관할 전망이다. 박물관에 들어갈 소장품은 그동안 수집이 많이 돼 상태이고 그곳에 한 자리를 차지할 명예의 전당도 이제부터 준비해야 한다. 오센(OSEN)은 특별기획으로 명예의 전당(Hall Of Fame) 주인공이 될 레전드 스타들을 찾아 인터뷰한다. 또한 한국야구 미래를 책임질 기대주(Hope)를 찾아갈 예정으로 일명‘KBO 호프를 찾아서’시리즈를 연재한다. [편집자주]

박철순(69) 선수는 한국 프로야구의 전설적인 투수로, 1982년 원년 시즌에서 22연승을 기록하며 OB 베어스(현 두산 베어스)의 우승을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선수 생활 동안 여러 차례 부상을 겪으며 '불사조'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습니다. 그의 야구 인생 역정을 들어보았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프로야구선수 몸값은 높다. 입단 당시 강남 아파트 2채값 상당의 몸값으로 지금이면 100억 원 이상 가치였다....-

=미국 생활을 접고 두산 베어스(전신 OB 베어스)에 1982년 입단하면서 당시 최고 몸값을 받았습니다. 계약금 2000만 원도 최고이고 연봉도 2400만 원으로 최고를 기록했습니다. 메이저리그를 뒤로 하고 온 것에 대한 만족할만한 대가였나요.

▲마이너리그 생활할 때에 비하면 엄청난 금액이었죠. 한국야구 최고 대우이니 만족할만 했습니다. 계약금과 연봉 합쳐서 4400만 원이면 강남에 18평 아파트가 900만 원할 때이니 큰 돈이었습니다. 계약금으로 서울 신반포에 아파트 25평을 바로 구입하고 뒷바라지해주신 부모님께도 드렸죠. 신혼생활을 그곳에서 했죠. (당시 계약금은 2000만 원이 상한이었고 연봉도 2400만 원이 상한으로 뒤늦게 프로에 합류한 김재박(MBC 청룡)과 함께 그 해 최고 연봉이었다. 당시 선수 평균연봉은 1200만원 정도)

=현역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라면.

▲아무래도 원년 최다승(24승) 및 22연승, 그리고 원년 챔피언에 오른 것이 최고의 순간이었죠. 경기수(팀당 80게임)가 적은 가운데서도 24승을 거둔 것은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거기다가 22연승(한미일 최고 기록으로 아직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까지 했으니 가장 기억에 남죠. 한국시리즈에서도 우승을 차지하고 초대 정규시즌 MVP에 올랐으니 최고의 한 해였습니다(정규시즌 MVP 투표에서 만장일치로 선정돼 아직까지도 나오지 않고 있는 또 하나의 기록이다). 또 구단에서 1997년에 베풀어준 은퇴식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사진>박철순의 은퇴식 장면 /KBS N 스포츠 제공

=두산 베어스의 현존하는 영구결번(21번) 출신으로서 자부심은.

▲개인적으로 정말 영광스러운 일이죠. 내 등번호가 베어스에서는 영구적으로 나만 보유하고 있다는 것은 자랑스럽고 선수로선 최고의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고생했던 것에 보상받았던 기분으로 뿌듯했습니다. 팬들의 성원과 구단의 배려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참고로 두산 베어스는 유망주였으나 일찍 생을 마감한 포수 김영신을 예우차원에서1986년 첫 번째 영구결번으로 지정했고 원년부터 간판타자였던 윤동균 전감독의 배번을 2번째 영구결번했으나 1994년 발생한 선수단 항명사태로 인해 중간에 해제했다. 따라서 두산 베어스 영구결번 선수는 김영신과 박철순 두 명뿐이다)

=이에 반해 가장 아픈 기억과 힘들고 아쉬웠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아무래도 선수 말년이 아쉽고 미안했습니다. 몸이 안따라주니 정상적인 컨디션으로 경기에 나가지 못하는 등 팀에 민폐를 끼친다는 생각에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은퇴도 계속 고민했는데 구단에서 끝까지 배려해줘 감동적인 은퇴식까지 갖게 됐습니다. 또 1987년 미국에서 두 번째 허리 수술을 받은 뒤 ‘걷기도 힘들다’,‘더 이상 선수생활은 힘들 것 같다’는 판정을 받았을 때가 가장 가슴 아팠던 시기였습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선수 시절 허리, 아킬레스건 파열 등 여러 차례 부상을 겪었는데, 그때마다 재기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나요.

▲가족들, 베어스 구단 식구들과 팬들 등 주변의 응원이 많은 힘이 됐죠. 언론에서도 계속 다뤄주며 응원을 해줬고요. 미국에서 수술 후 ‘걷기도 힘들다’는 판정을 받고 휠체어를 타고 귀국했을 때 정말 힘들었고 미국 의사한테 아는 영어 욕은 다했던 것 같아요. ‘내 몸은 내가 알아서 판단한다’며 분노했죠. 귀국 후 매일 밤 잠도 못자며 고민하다가 새벽 3시가 되니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한강에 나가서 걷는 것부터 혼자 재활 훈련에 매진했죠. 그렇게 포기하지 않고 인내하며 훈련하다보니 다시 걷기 시작했고 빠졌던 근육도 생기고 힘이 붙어 1988년 마운드에 다시 서게 된 겁니다. 재활은 성과도 잘 안나오고 힘든 과정입니다. 그래도 포기 하지 않고 꾸준히 하면 조금씩 조금씩 살아납니다. 무엇보다도 다시 시작하겠다는 본인의 의지가 가장 중요합니다. 다시 복귀하니 기자분들이 ‘불사조’라는 별명도 만들어줬고요. 덕분에 1995년 두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의 감격도 맛볼 수 있었습니다.

<사진>박철순이 선수시절 가장 까다로웠던 타자 이만수(가운데), 허구연 KBO 총재와 함께 야구를 관람하고 있다.

=선수시절 상대 타자들 중에서 가장 까다로웠던 선수는 누구였나요.

▲홈런타자들이었던 김봉연, 김성한, 이만수였죠. 요즘 박병호같은 타자들은 몸쪽 공도 손목을 접어주며 때릴 정도지만 당시에는 몸쪽 직구를 제대로 치는 선수가 드물었습니다. 특히 이만수는 가장 징글징글한 상대 타자였습니다. 몸쪽 공도 손목을 제치며 쳐서 장타로 연결한 선수였습니다.

=야구관련해서 개인적으로 가장 아끼는 소장품은 어떤 것인가요. 트로피나 공, 글러브 등등

▲보관하고 있던 선수 시절 애장품은 대부분 야구박물관 건립하는 곳에 기증했습니다. 남은 것은 아들 집에 보관 중입니다. 1982년 받은 원년 MVP 트로피는 기증하기가 힘들더라고요. 한국프로야구 원년 상징이자 내생애 첫 번째 트로피이다 보니 가장 아끼는 애장품이죠.

=수년안에 한국야구 명예의 전당이 생긴다고 합니다. 제생각에는 위원님도 유력한 후보자로 보입니다. 위원님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난 100승도 못채웠는데 자격이 있나요. 첫 해 반짝하고는 부상 등으로 제대로 뛴 적이 많지 않고 기록적인 부분으로 따지면 한참 부족하죠. 한국프로야구 초창기 발전과 붐 조성에 기여한 점을 고려한다면 모를까.(1980년대에는 지금보다 경기수가 현저히 적는 등 현재 기록과 비교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점도 사실이다. 또 박철순은 2022년 선정한 한국프로야구 리그 40주년 올스타 투수부문에 선정된 레전드이기도 했다)

=후배 투수들에게 전하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또한 요즘 후배들 중에서 인상적인 선수는.

▲훈련량이 예전보다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특히 체력적인 부분은 많이 쌓아야 합니다. 긴 시즌을 버텨내기 위해서는 체력이 무조건 필요합니다. 또 나만의 스트레스 해소법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과음이나 도박 등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해소법은 안되고 경기를 복기하면서 가볍게 혼 술 정도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또 요즘 투수들은 강속구에 너무 집착하고 손장난(변화구)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는데 중요한 것은 직구 볼끝과 안정된 제구력입니다. 아무리 빠른 볼을 던져도 볼이 되면 소용없는 일이니까요. 투수가 가장 짜릿한 순간이 언제인지 아세요. 많은 분들이 3구 헛스윙 삼진으로 알지만 3구 루킹 삼진입니다. 타자가 칠 염두조차 못낼 정도로 압도적인 구위이면 스트라이크존 한복판에 던져도 안맞아요. 또 몸쪽 직구를 던질 줄 알아야 합니다. 루킹 삼진으로 타자를 돌려세울 때가 투수에게는 가장 희열에 찬 순간입니다.

팔이 안으로 굽어서가 아니라 요즘 투수들 중에서 눈에 띄는 선수라면 두산 베어스 투수 곽빈입니다. 정말 좋은 공을 가지고 있습니다. 메이저리그에서도 충분히 통할 구위라고 봅니다. 강속구와 변화구 컨트롤이 돋보입니다.

(3편에서 계속됩니다)

/박선양 기자 sun@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