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부끄러움을 모르는 SK와 LG의 배터리 전쟁

조선비즈
  • 전재호 산업부장
    입력 2021.03.27 04:00

    정세균 국무총리가 지난 1월 28일 SK이노베이션과 LG에너지솔루션의 배터리 갈등과 관련해 "정말 부끄럽다. 양사가 빨리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라고 공개적으로 밝혔을 때만 해도 ‘정부가 민간 기업의 문제에 과도하게 개입한다’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의 최종 판결 이후에도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두 기업이 소모적인 감정 싸움만 하고 합의를 위한 노력보다는 장외 여론전만 펼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정말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ITC가 "SK가 영업비밀을 침해했다"는 LG 측의 손을 들어줬음에도 SK는 "침해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계속하고 있다. LG의 영업비밀을 침해하지 않았다면 SK 입장에서는 ITC의 판결이 몹시 억울하겠지만, 현재까지 밝혀진 정황으로 보면 합리적인 의심이 드는 게 사실이다.

    후발업체가 선두업체를 따라잡는 가장 빠른 방법은 선두업체의 인력을 빼와 그 노하우를 활용하는 것이다. SK는 2017년부터 2019년초까지 LG 인력 76명을 데려갔다. 경쟁업체의 인력을 단기간에 대규모로 흡수한 SK는 "연봉 등 처우 개선과 미래 발전 가능성을 고려해 당사자가 결정한 것"이라는 입장이다. 돈을 적게 주고 관리를 제대로 못해서 직원들이 이탈하는 것이라는 주장은 LG 입장에서는 조롱처럼 들렸을 것이다.

    모욕감과 위기감을 느꼈을 LG는 2019년 4월 29일 ITC에 소송을 제기한다. 미국에는 한국과 달리 ‘디스커버리(Discovery)’ 제도가 있다. 본격적인 재판 전에 당사자가 가진 소송 관련 증거를 상호 공개·교환·제출하는 것이다. "SK가 우리 영업비밀을 가져갔으니 무슨 자료를 갖고 있는지 살펴보자"는 게 LG의 생각이었다.

    SK는 LG로부터 소송 관련 내용증명 경고공문을 수령한 2019년 4월 9일부터 증거를 보존해야 할 의무가 발생했지만, ITC는 SK가 이를 어기고 관련 문서를 적극적으로 삭제하거나 삭제하도록 방관했다고 판단했다. LG화학 출신 SK이노베이션 직원의 PC에서는 ‘LG, L사, 경쟁사’ 등의 키워드가 포함된 삭제파일 980개가 나왔다.

    ITC는 SK 측의 문서 삭제를 증거인멸 및 법정모독 행위로 판단해 지난해 3월 조기패소 판결을 내렸다. 이달 초 공개한 최종판결에서는 "SK는 LG로부터 훔친 22개의 영업비밀이 없었다면 10년 이내에 영업비밀 상의 정보를 개발할 수 없을 것"이란 LG의 주장에 동의한다고도 했다.

    SK는 당시 문서 삭제가 일상적인 보안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며 삭제한 자료도 LG의 영업비밀 침해와는 관련이 없다고 주장한다. SK의 주장대로라면 안 지워도 되는 자료를 굳이 증거보존 의무까지 어겨가며 지우는 바람에 조(兆) 단위의 피해를 보게 생겼다는 것인데, 선뜻 납득하기가 어렵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ITC의 결정에 4월 11일까지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고 두 회사가 합의를 하지 않으면 SK는 미국 내 배터리 사업을 접어야 할 상황이다. LG 측은 3조원대, SK 측은 1조원대를 합의금으로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SK는 LG의 요구금액이 과도하다고 주장한다.

    양측이 합의를 하려면 우선 감정의 골부터 메워야 한다. 상대방을 조롱하고 비난하는 것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SK는 LG의 영업비밀을 침해하지 않았다면 "ITC 판결문에 적시된 영업비밀 목록과 증거자료를 두 회사가 직접 확인해보자"는 LG 측 주장을 수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LG도 승기를 잡았다고 해서 SK에 굴욕적인 항복을 요구하지 말고 퇴로를 열어줘야 한다. 3조원대 합의금에 구체적인 근거가 없다면 SK 경영진은 배임 가능성 때문에라도 동의하기가 어렵다.

    전기차 시대를 앞두고 모빌리티 시장은 큰 변화가 예상된다. 국내 대표기업인 SK와 LG가 부끄러운 감정 싸움을 그만 두고 해외 시장에서 정정당당하게 겨루는 모습을 보여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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