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장칼럼] 반도체 내셔널리즘 한창인데…한국은 불구경만

조선비즈
  • 박진우 전자팀장
    입력 2021.03.25 16:34

    서울구치소 구속 중 충수염(맹장염)으로 수술을 받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고열이 나는 등 자신의 건강에 이상이 있는데도 특혜로 보일까 봐 교정 당국에 몸 상태를 제대로 알리지 못했다고 한다. 이 부회장은 충수가 터진 줄도 모르고 3일간 끙끙 앓다가 결국 대장 일부가 괴사해 조직을 잘라낸 것으로 전해졌다. 최근 만난 삼성전자 한 임원은 "오죽하면 그랬겠냐. 글로벌 시장은 무한경쟁 체제로 흘러가고 있는데, 우리(삼성전자)는 투자를 결정해야 할 총수가 구속 상태고, 그마저 눈치가 보여 아프다고 얘기도 못 한다"고 하소연했다.

    지난해 만났던 SK하이닉스 관계자는 120조원을 투자해 반도체 공장 4개를 건설할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 물을 대기가 어렵다며 걱정했다. 반도체 제조에 필수적인 물은 확보했으나, 정작 물길은 확보하지 못한 탓이다. 회사는 정부가 해당 지역을 소부장(소재·부품·장비) 특화단지로 지정해 용수 지원을 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움직임은 없었다. 약속을 믿고 투자 결정을 내린 회사에서는 사실상 방치된 것 아니냐는 소리가 나왔다. 정부는 지난 2월에서야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를 소부장 특화단지로 지정했다.

    반도체 수요 증가로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생산능력이 부족해지자, 국내 중소형 반도체 설계(팹리스) 기업들이 고사 직전에 몰렸다. 제품을 생산해 줄 국내외 파운드리 팹(공장)이 수익성이 낮은 우리 기업들을 배제하고 있어서다. 업계는 정부가 국내 파운드리 확보라도 도와주길 기대했지만, 정부 생각은 달랐다. 정책적 지원책이 있냐는 기자의 질문에 정부 관계자는 "시장 논리에 따를 수밖에 없다"고 답했다.

    최근 글로벌 반도체 업계 전반에 국수주의, 이른바 ‘반도체 내셔널리즘’이 떠오르고 있다. 반도체가 현대 산업의 ‘편자의 못’처럼 여겨지면서 대두된 개념이다. 반도체 핵심 설계·제조 역량을 국가적으로 갖추자는 움직임으로 해석된다. 편자의 못이 없어 전투에서 패한 나폴레옹처럼 반도체 없이는 미래 산업 경쟁에서 도태될 것이라는 위기감이 세계 각국에서 높아지고 있다.

    세계 1위의 종합반도체기업 인텔은 최근 22조원을 들여 미국 애리조나에 반도체 공장 2개를 짓겠다고 발표했다. 인텔은 반도체 제조의 80% 이상이 한국과 대만 등 아시아권에 몰려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대로는 반도체 헤게모니를 영영 잃을 수 있기에 과감한 투자를 선언한 것으로 풀이된다.

    앞서 지난 2월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는 최근 반도체 등 핵심부품의 서플라이 체인(공급 사슬)을 재정비한다는 내용의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인텔의 투자 계획은 이와 맥을 같이 한다. 팻 겔싱어 인텔 최고경영자(CEO)는 "바이든 행정부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며 "인텔이 파운드리 서비스를 확대할 경우 미국 내 반도체 자급률이 크게 올라가고, 미국 정부에도 미국에서 생산한 반도체 제품이 공급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다. 미국은 반도체 인프라, 연구개발에 단기적으로 40조원을 쓰기로 했다.

    중국은 미국의 강력한 압박과 제재 속에서도 ‘중국제조 2025’ 전략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이 전략은 반도체를 비롯한 10대 첨단 제조업 분야의 핵심 기술, 부품, 소재 자급도를 2025년까지 70%로 끌어 올리겠다는 게 핵심이다. 이를 위해 중국에서는 지난 2019년 말 기준으로 50개 이상의 반도체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투자비만 280조원이다.

    유럽연합(EU)도 반도체 자생력을 기르기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2030년까지 140조원을 들인다. 가장 적극적인 나라는 제조업 강국인 독일이다. EU는 유럽 내 반도체 생산량을 글로벌 20%까지 늘리겠다는 계획이다.

    세계 각국이 자국 기업 육성과 상대국 견제를 위해 ‘반도체 내셔널리즘’을 향해 가는 와중에 우리 정부의 구체적이고 명확한 전략은 없다. 정부가 밝힌 2030년 세계 시스템 반도체 1위 목표는 삼성전자의 목표를 그대로 갖다 쓴 것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정부 조직 내에서의 전문성 부족과 반기업정서는 인텔보다 5배 많은 돈을 투자하겠다고 한 기업을 오히려 궁지로 내몰고 있다. 한술 더떠 작은 기업의 명운은 시장 논리에 맡겨 나가떨어지든 말든 관심 없다고 하는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삼성전자가 해외 공장 증설에 19조원을 쓰겠다고 하니, 여당에서는 득달같이 리쇼어링(제조업 본국 회귀) 얘기가 나온다. 미래 먹거리를 위한 기업의 고군분투를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언제까지 숟가락을 얹으려 하냐는 불만이 들려온다. 지원도 없이 생색만 내려고 한다는 것이다. 2021년 반도체 내셔널리즘이라는 거대 흐름 속에서 대한민국은 실종돼 있다. 이대로 영영 반도체 아웃사이더가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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