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이재용 삼성전자(005930)부회장의 상속세 납부와 맞물려 재계와 미술계에서 ‘문화재·미술품 물납제’가 화두로 떠올랐다. 현행 상속세 및 증여세법은 부동산과 유가증권에 한해 세금 대납을 허용하고 있는데, 미술계에서 대납 가능 대상을 문화재와 미술품까지 확대하자는 주장이 나온다.
재계에서는 ‘이건희 컬렉션’으로 불리는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미술 소장품이 삼성가(家)의 상속세 마련을 위해 시장에 매물로 나올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미술계는 이 회장의 미술품이 대거 해외로 반출될 가능성이 있다며 이를 막기 위해 막대한 상속세 일부를 미술품으로 대납토록 하자고 주장한다. 재계에서도 "이건희 컬렉션 중 유명 화가들의 작품이 해외에 매각되는 것은 막아야 하지 않느냐"는 의견들이 조심스럽게 나온다.
이건희 컬렉션의 해외반출을 막기 위해 국가가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 비등하지만, 일부 시민단체는 물납제 도입을 ‘삼성특혜’라며 반대하고 있다.
◇ 11조원 상속세 납부 위해 ‘이건희 컬렉션’ 매각하나
13일 재계에 따르면 삼성이 한국화랑협회 미술품감정위원회와 한국미술품감정센터, 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 등 3곳에 의뢰한 미술품 감정 보고서가 이르면 다음주 삼성 측에 전달된다. 삼성가는 이 보고서를 바탕으로 미술품 처리 방안을 마련할 것으로 전해졌다.
재계에서는 이 부회장 등 삼성가가 막대한 상속세를 마련하기 위해 이 미술품 중 일부를 매각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이 회장 주식 상속에 따른 삼성가의 상속세는 11조366억원으로 역대 최고 규모다. 시장에서는 삼성가가 상속받은 주식을 세무당국에 담보로 제공하고 주식 배당금과 금융권 대출로 재원을 마련해 상속세를 분납하는 방안이 유력하게 거론된다. 현행법상 상속세 부담이 클 경우 상속 자산을 세무서 등에 담보로 제공한 뒤 5년간 세금을 나눠서 낼 수 있다.
다만 배당금과 대출만으로는 막대한 상속세를 감당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삼성가가 상속 주식 일부와 미술품 등을 매각해 상속세 재원을 마련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한 재계 관계자는 "올해부터 배당금 세율이 올라 배당금으로 상속세를 내는 것은 다소 부담이 될 것"이라며 "상속세 규모가 워낙 크다보니 대출금의 이자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결국 주식 등 일부 자산을 매각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삼성가가 ‘이건희 컬렉션’을 매각할 수 있다는 소식이 들리자 미술계가 발칵 뒤집혔다. 국가지정문화재와 근대미술품은 문화재보호법상 해외 반출이 금지되지만, 서양 유명 작가의 작품은 해외 구매자에게 매각될 경우 다시 국내로 돌아올 가능성이 희박하다. 이건희 컬렉션에는 파블로 피카소, 클로드 모네, 마르크 샤갈, 오귀스트 로댕, 프랜시스 베이컨, 앤디 워홀 등 서양 유명 작가 작품들이 대거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미술계에서는 이건희 컬렉션의 가치를 3조원 이상으로 추산하고 있다. 서양 유명 작가 작품의 경우 ‘부르는 게 값’이라 실제 가치는 더욱 늘어날 수 있다는 게 미술계의 중론이다.
◇ "물납제 도입해 미술품 해외 유출 막아야"... 일부선 ‘삼성 특혜’ 반발
미술계에서는 문화재·미술품 물납제를 도입해 이건희 컬렉션의 해외 반출을 막자는 주장이 나온다. 황달성 한국화랑협회 회장은 지난 2월 기자회견에서 "이건희 회장 컬렉션이 국외로 유출되지 않도록 상속세를 미술품으로 납부하는 물납제가 필요하다"고 했다.
한국화랑협회 등 문화예술단체 12곳과 전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8명은 지난 3일 문화재·미술품 물납제의 조속한 제도화를 촉구하는 건의문을 내기도 했다. 최근에는 미술계를 중심으로 물납제 관련 세미나가 열리기도 한다.
미술계의 이런 주장은 문화재나 미술품의 해외 반출을 막자는 문화재·미술품 물납제의 본래 취지와도 부합한다. 미술계는 문화재·미술품 물납제를 도입하면 개인이 소유한 문화재와 미술품의 해외 유출을 막고 국가가 이를 관리·전시해 해외 관광객도 유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한 업계 관계자는 "이미 해외 유명 미술품 컬렉터들이 이건희 컬렉션에 관심을 보이고 물밑 접촉을 한다는 소문이 업계에 파다하다"고 했다.
물납제 논의가 다시 시작된 것은 지난해 5월 전형필 전 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장의 유족들이 보물급 불상 두점을 경매에 내놓으면서다. 간송 전형필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유출되는 서화, 도자기, 불상, 석조물, 서적 등 문화재를 사비를 털어 수집한 인물이다. 그런데 유족들이 재단 운영 등에 따른 재정 압박으로 상속받은 불상을 경매로 넘긴 것이다. 당시 미술계에서는 "간송이 어떻게 지킨 문화재인데 해외에 팔릴 상황이 됐다"며 물납제 도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를 냈다. 이에 지난해 11월 이광재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물납제 도입을 골자로 하는 상속세 및 증여세법 개정안을 발의하기도 했다. 이후 이건희 컬렉션의 매각 가능성이 나오면서 물납제가 또다시 화두로 떠오른 것이다.
물납제 도입 주장이 거세지자 일부 시민단체는 이를 ‘이건희 특별법’이라며 반발하고 나섰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최근 성명서를 내고 "가치를 판단하기 쉽지 않은 문화재와 미술품 물납은 조세회피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며 "이건희 삼성 회장의 상속세 이슈가 첨예한 상황에서 미술품 등 상속세 물납제 도입 논의는 그 의도가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물납제를 도입한다고 해도 삼성가에 적용하기는 무리가 있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우선 삼성가의 상속세 자신 신고 기간이 다음달 말인데 그때까지 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기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개정안이 통과돼도 삼성가가 ‘재벌 특혜’라는 비난 여론을 감수하고 미술품으로 상속세를 낼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게 재계의 공통된 견해다.
삼성가와 가까운 한 재계 관계자는 "미술품 처리 방안은 결정이 되지 않은 것으로 안다. 선친의 뜻과 가족들의 의견을 종합해 미술품 처리 방안을 논의할 것으로 안다"고 했다.
이건희 컬렉션의 예술적 가치를 감안해 물납제가 아니더라도 어떤 방식으로든 정부가 나서 이를 사들여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최병서 동덕여대 명예교수는 "삼성이 출연하는 미술품의 가치를 가장 낮게 평가한 감정액을 기준으로 국세청이 독점적 위치에서 가장 저렴하게 사들이는 방법이 있다"며 "출연할 미술품을 전시할 수 있는 좋은 미술관을 지어서 국립 혹은 시립미술관으로 귀속시키는 획기적인 제안을 내놓으라고 조언하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