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하고 실망할 수는 있어도 우리가 여기서 무너지려고 여기까지 온 것은 아닙니다."

형제복지원 피해자모임의 한종선 대표가 대법원의 비상상고 기각 결정 직후 기자들을 만나 한 말이다. 대법원 2부(주심 안철상 대법관)가 11일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한 검찰총장의 비상상고 2건을 모두 기각하면서 34년 동안 무려 8차례의 재판을 거친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한 법적 다툼은 일단락됐다.

대법원이 비상상고를 기각했기 때문에 외견상 이번 판결은 형제복지원 피해자의 목소리를 법원이 외면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피해자들에 대한 변론을 맡았던 박준영 변호사는 "결과인 주문은 기각이지만, 결과에 이른 ‘과정’에서 밝힌 ‘이유’가 의미 있는 판결"이라고 밝혔다. 박 변호사의 지적대로 대법원 판결문을 자세하게 뜯어보면 이번 판결은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의 '패배'의 기록이 아니라 '승리'의 기록이다.

◇특수감금 유죄 인정받기 위해 34년간 재판만 8번

형제복지원 사건은 1975년으로 거슬러간다. 당시 내무부는 부랑인의 단속·수용·보호를 목적으로 내무부 훈령 제410호 '부랑인 신고, 단속, 수용, 보호와 귀향 및 사후관리에 관한 업무처리지침'을 발령했다. 이 훈령의 주된 내용은 시장⋅군수⋅구청장으로 하여금 경찰과 합동으로 부랑인 단속반을 편성해 부랑인 단속을 실시하고, 단속된 부랑인 중 연고가 불확실한 사람을 시⋅도 단위로 설치된 부랑인수용시설에 위탁 수용하게 하는 것이었다.

형제복지원 수용카드.

고(故) 박인근씨는 1975년 형제복지원을 설립하고 부산시장과 부랑인선도 위탁계약을 맺었다. 그런데 단속기관에서 인계되는 부랑인이 계속 늘어나자 박씨는 1985년 경남 울주군에 신규 수용시설인 '울주작업장'을 만들고 그곳에 복지원 수용자를 일부 옮겼다. 그리고 1986년 7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울주작업장 수용자가 도주하지 못하도록 피해자 일부를 경비원으로 임명하고 감시견 10여마리를 이용해 수용자들을 감금했다. 또 야간에는 숙소시설을 자물쇠로 잠그기도 했다.

박씨는 1987년 1월 감금행위로 기소됐는데, 경비원과 감시견을 이용한 감금행위는 '주간감금행위'로, 자물쇠를 이용해 숙소를 잠근 행위는 '야간감금행위'로 각각 기소됐다.

이후 박씨의 감금행위가 위법인지를 놓고 길고 긴 법정싸움이 펼쳐졌다. 1987년 6월 제1심인 부산지방법원 울산지원은 박씨의 공소사실을 전부 유죄로 인정해 징역 10년 및 벌금 6억8178만원을 선고했지만, 항소심인 대구고등법원은 주간감금행위는 무죄로 보고 야간감금행위만 유죄로 판단해 징역 4년을 선고했다.

이후 1차 상고심에서 대법원은 야간감금행위가 특수감금죄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파기환송했고, 1차 환송심은 다시 야간감금행위가 유죄라며 3년을 선고했다. 하지만 2차 환송심에서 대법원은 다시 야간감금행위는 형법 제20조에 따라 위법성이 조각된다며 재차 파기환송 결정을 내렸다. 형법 제20조는 '법령에 의한 행위 또는 업무로 인한 행위 기타 사회상규에 위배되지 아니하는 행위는 벌하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결국 2차 환송심은 1·2차 상고심판결의 취지에 따라 야간감금행위를 무죄라고 보고 특수감금의 공소사실을 무죄로 판결했다. 1989년 7월 3차 상고심에서 대법원이 2차 환송심 판단을 정당하다고 보고 검사의 상고를 기각함에 따라 판결이 확정됐다.

2018년 11월 27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이룸센터에서 문무일 검찰총장이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을 만나 발언을 듣는 중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후 수십년 동안 잊혀져 있던 형제복지원 사건은 2018년 11월 문무일 전 검찰총장이 비상상고를 신청하면서 다시 관심을 받았다. 당시 대검찰청 산하 검찰개혁위원회와 법무부 산하 검찰과거사위원회는 비상상고를 권고했고 문 전 총장이 이를 받아들인 것이다. 비상상고는 확정판결을 대상으로 그 심리 또는 재판에 법령위반이 있는 경우 검찰총장이 신청할 수 있는 비상구제절차다.

검찰총장이 비상상고를 신청하고 2년 4개월 만에 대법원은 마지막으로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한 최종 판단을 내렸다. 결론은 비상상고 기각이었다. 비상상고가 인용되려면 대상 판결에서 인정한 '사실' 자체는 바뀌지 않고 법령 적용이 잘못된 부분이 있어야 하는데, 형제복지원 사건은 법령적용의 전제사실을 오인함에 따라 법령을 위반한 경우이기 때문에 비상상고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판단이었다.

◇"대법원 판결문은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승리의 기록"

대법원이 비상상고를 기각함에 따라 특수감금죄에 대한 박씨의 무죄는 확정됐다. 하지만 박 변호사의 말처럼 형제복지원 피해자에 대한 국가 차원의 손해배상은 이제 시작이다. 대법원은 비상상고를 기각하면서도 형제복지원 사건이 얼마나 심각한 인권 침해 사건인지와 국가적인 손해배상 책임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지적했기 때문이다.

대법원은 "형제복지원 수용자들은 폭행을 당하거나 심지어 죽임을 당하더라도 저항하지 못하고 자기의 불행이 타인의 기분이나 감정에 맡겨진 삶을 살아왔고, ‘부랑인’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 격리⋅고립되어 소외된 삶을 살아왔다"며 "이 사건이 갖는 문제의 핵심은 단순히 ‘신체의 자유’가 침해되었다는 점보다 헌법의 최고가치인 ‘인간의 존엄성’이 침해되었다는 점"이라고 밝혔다.

또 대법원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활동으로 규명된 진실에 따라 희생자와 피해자 및 유가족의 피해와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한 정부의 적절한 조치를 통해 피해자들의 아픔이 치유돼 사회 통합이 실현되기를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박준영(가운데) 변호사가 11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에서 고(故) 박인근 전 형제복지원 원장에 대한 비상상고 기각 후 브리핑을 하고 있다.

대법원은 비상상고를 기각한 건 비상상고의 이유에 이번 사건이 해당하지 않기 때문이지 사건의 본질에 대한 인식이나 피해자에 대한 피해 회복 조치의 필요성은 별개의 문제라고 강조했다. 법은 법이고, 사람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박 변호사는 대법원의 판결 이유에 형제복지원 피해자의 피해 회복을 위해 의미있는 내용이 많다고 평가했다. 형제복지원 사건을 국가기관 주도로 부랑인을 지목해 대규모 인권유린을 한 사건이라고 대법원이 평가했고, 덕분에 이 사건에 대한 국가배상책임의 소멸시효가 사라졌기 때문에 피해자에 대한 국가배상청구소송이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박 변호사는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은 수동적이고 나약한 피해자이길 거부했다. 스스로를 피해생존자로 명명하며 사건의 목격자이자 생존자로서 증언해왔고, 행동해왔다"며 "대법원 판결문에 담긴 ‘인간의 존엄성’은 이 사회의 주인인 시민으로서 제 발로 서서 제 목소리로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길에 매진한 ‘피해생존자들’의 승리의 기록"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