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수 칼럼] 어린 아이의 말을 들으라

입력 2020.11.18 07:00 | 수정 2020.11.19 09:54

김지수 문화전문기자
한창 ‘아이의 말'에 관심이 가던 차에 김소영의 에세이 ‘어린이라는 세계’를 읽었다. 독서교실에서 만난 아이들을 관찰해서 한 명 한 명을 정확하게 그린 책이다. 책 속의 아이들은 웃기고 다정하고 애틋하고 사려 깊다. ‘내가 어렸을 때는 종이접기를 잘 못했다'거나 ‘엄마가 딸기잼 뚜껑 못 열 때 내가 해줬다’거나..., 옛날을 회상하고 현재를 자랑스러워하는 어린이를 보면, 자기 성장의 그 미묘한 감수성에 흠뻑 매료된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헤아려보는 그 관대한 시선이라니!

곤드레나물을 드래곤나물로 알아듣고 그릇에서 용 모양을 찾는 아이, 흑설탕을 흙설탕으로 착각해서 한사코 사양하는 아이, "서로 몸이 달라도 ( )하자"의 괄호 안에 ‘반겨 주자’ ‘같이 놀자'를 써넣는 믿음직한 어린 활동가들을 보고 있노라면 주변 세계를 향한 그 순한 마음에 미소가 절로 난다.

‘남의 집 아이'를 가르치는 교사 김소영은 이 어린 사람의 품위를 한껏 고양시켜 준다. 그가 독서교실에 오는 어린이의 코트를 받아 걸어주거나, 비 오는 날 존댓말로 ‘우산을 씌워줘도 될까요?’라고 묻는 이유는 귀하게 대접받을 때 귀함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정중하게 대할수록 점잖게 행동하기 때문이다.

"나는 비를 맞으면 안 되는 소중한 사람이구나." "다른 사람도 그렇게 대접해야 하는구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아무도 모른다'의 한 장면. 크리스마스에 메모 한장 남기고 사라진 엄마를 대신해 동생들을 돌보는 아키라 역을 연기한 배우 아기라 유야는 이 작품으로 2004년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우리 모두 한때는 어린아이였다. 그리고 ‘한 때의 어린 사람’을 나는 제법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허풍을 떨거나 거짓말을 하거나, 부끄러움도 모른 채 싸우는 어른들 사이에 끼어, 나는 막막했다. 귀여움을 떨며 모른 척 버텼지만, 그때 내가 느낀 것은 고독이었다. 어른이 어린이의 말을 듣지 않을 때, ‘네까짓 게 뭘 알아' 얕잡아 무시할 때, 어린이는 한없이 고독해진다. 그 고독이 더는 견딜 수 없을 때 아이는 분개한다.

채널A의 ‘금쪽같은 내 새끼’에서 화가 나서 어쩔 줄 모르는 아이를 볼 때마다, 뜨끔해지는 사람은 나뿐이 아닐 것이다.

특별히 한 아이의 말이 기억난다. "치고받고 싸우도록 놔두지 그랬어." 지쳐서 무심코 던진 엄마의 말에 아이는 제 몸이 찢어져라 울부짖는다. "그 말이 충격적인 게 아니라 그 뜻이 충격적인 거잖아. 날 죽이려는 거잖아. 난 아들이 아니라는 거잖아." 영문 몰라 어리둥절한 어른을 향해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는 또박또박 아이의 속마음을 통역해냈다.

"우리가 싸우면 부모가 잘 지도해주고 몸이 안 다치도록 보호해줘야지. 그래야 어른이잖아. 그래야 부모잖아."

마음으로 들어야 들리는 그 소리에, 그 옛날 우물 밑으로 까마득하게 떨어지던 내 유년의 목소리와 어린 딸의 노기 어린 목소리가 겹쳐서 들렸다. 아이들은 연약하지만 무기력하지 않다. 작은 몸으로도 어떻게든 파괴되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울타리 밖으로 쫓겨나지 않기 위해, 사라지지 않기 위해. 오직 생명의 본능으로 어른을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빨리 용서한다. 그 조그만 골상으로 어떻게 이 세계의 비루한 섭리를 다 이해하고 나왔을까.

최근 개봉한 한국 영화 ‘소리도 없이'와 ‘담보’를 보면, 납치된 아이들은 자신을 구하러 와 줄 어른이 없다는 걸 알았을 때조차, 낙담하지 않는다. 목숨을 담보 잡힌 채로도 제 몫의 집안일을 해내며 유사 가족의 질서를 잡아간다. 눈부신 적응력과 총명함으로 스스로를 구원해내며.

일본 사회의 어두운 면을 고발해온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속 아이들도 다르지 않았다. 유기된 채로 더 어린 동생을 돌보며 담담하게 버텨 낸다. 태어났으니까 살아야 한다는 듯. 아이들은 아무도 비난하지 않음으로, 더 비범해졌다.

영화 ‘소리도 없이'의 한 장면. 유괴된 아이는 희생양 프레임에서 빠져나와 스스로의 기지로 자기를 구원한다.
어떤 공간에서 어떤 상태로 마주치든 어떤 어린이가 품위 있어 보인다면, 그건 가까운 어른이 그들을 대상화하거나 귀여워하지 않고 인간 대 인간으로 존중해주었기 때문이다. 영화 현장에서는 아역 배우가 아닌 한 명의 배우로, 독서 교실에서는 제 취향을 가진 독립된 애서가로, 식당에서는 어리다고 쫓겨나지 않는 손님으로. 차별없이 한 몫의 시민으로 정중하게 대우받았기 때문이다.

‘커버린 마음'에 ‘덜 자란 몸’이라는 ‘핸디캡’은, 이 변화무쌍한 존재가 어른에게 내준 숙제일 지도 모른다. 아이가 불완전한 몸으로 안간힘을 쓰는 동안 기다려주는 것, 그 혼돈의 감정을 헤아려주는 것이 그 시기를 통과한 어른의 매너라고. 그렇게 작은 생명에 귀 기울이고 예의를 다하면, 어른은 더 약한 자들을 함부로 대할 수 없을 거라고. 아이가 디폴트가 되면 세계는 좀 더 고상하고 느긋해질거라고.

몸이 무례해지려 할 때마다 나는 기억하려 한다. "어른은 빨리할 수 있고, 어린이는 시간이 걸리는 것만 달라요"라는 아이의 정당한 마음을. 그럼에도 종종 표현되지 못한 말과 닿지 못하는 마음으로 이 우주에서 가장 고독해지는 귀한 여행자를. 내가 "바쁘다"고 투덜댈 때도 한없이 기다려주는 속 깊은 어린 사람을. 수시로 비참의 늪에 빠진 부모를 구원하는 용서의 천재를. 무엇보다 어른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함께 성장하기 위해서 태어난 이 복잡미묘한 스승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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