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훤의 왈家왈不] 휴거·엘사, 그 다음은?

조선비즈
  • 전태훤 선임기자
    입력 2020.11.13 09:36

    얼마 전 저녁식사 자리에서 중학교 1학년생 둘째 딸이 묻는다. "아빠, 엘사 알아?"

    "겨울왕국 ‘렛잇고(Let it go)’ 주인공 공주잖아. 극장에서 애니메이션도 같이 봤는데 기억 못할까봐?" 별거 아닌 듯 무심코 답했다.

    답답한 듯한 표정을 짓더니 다시 묻는다. "아니, 그거 말고 다른 거."

    ‘혹시 설마?’라는 생각이 스쳤다. 그냥 모른 척했다. "갑자기 왜?"

    아빠의 ‘무지함’이 뜻밖이란 듯 딸이 한 수 가르침을 시전한다. 요즘 LH(한국토지주택공사)가 지은 임대 아파트에 사는 사람을 줄여서 ‘엘사'라 부른다는 거였다. 하굣길에 초등학교 저학년쯤으로 보이는 무리의 대화를 들었는데 "누구누구는 ‘엘사’고, 쟤는 ‘삼백충’이래"라는 말을 웃으면서 아무 거리낌 없이 나누는 모습을 보고 당황스러워 전하는 말이라 했다.

    알고 있었다. 엘사가 뭐를 뜻하고, 삼백충이 부모 월급에 벌레 ‘충(蟲)’을 붙여 친구를 조롱하는 말이라는 것을. 동심(童心) 속에 남았어야 할 주인공이 대체 왜 여기서 나온단 말인가.

    엘사(오른쪽)와 여동생 안나, 크리스토퍼가 등장하는 ‘겨울왕국2’의 한 장면. /월트디즈니애니메이션스튜디오
    사실 임대 아파트 입주자를 낮잡아 보는 말로 엘사가 처음은 아니다. 몇 년 전에는 LH 아파트 브랜드인 ‘휴먼시아’에 사는 사람을 비하하는 뜻으로 어린 학생들 사이에서 ‘휴거(휴먼시아+거지)’란 말이 한때 유행처럼 돌기도 했다.

    ‘휴거’는 시작이었다. 그 후로 ‘빌거지(빌라 사는 거지)’ ‘전거지(전세 사는 거지) ‘월거지(월세 사는 거지)’란 혐오스러운 말로 주택 형태와 소유 형태까지 조롱하며 또래 무리를 계급화해 눈살이 찌푸려지는 경우도 있었다.

    비단 아이들 탓뿐일까. 같은 동네 단지라도 아파트 브랜드에 따라 가격이 벌어지고, 아파트에 밀려 빌라나 연립을 택해야 하고, 내 집 마련이 버거워 전세와 월세를 살아야 하는 주거 현실을 새로운 계급 구도로 만들어 서열화한 어른들의 어긋난 관념을 따라 배운 아이들에게 ‘휴거’와 ‘엘사’의 책임을 물을 수 있겠나.

    ‘엘사'란 조롱과 놀림이 있든 없든, 지금도 공공임대주택은 지어지고 있고, 또 앞으로도 지어질 거다. 정부가 LH와 서울주택도시공사(SH) 같은 공공기관을 통해 민간 주택을 매입하거나 빈 사무실과 상가를 임대주택으로 내놓는 방안을 검토하는 등 최근 불거진 전세난에 대응하기 위해 공공임대주택 공급을 확대하겠다고 했다. 최근엔 대통령까지 나서서 공공임대주택 면적을 늘리는 등 중산층까지 포함해 누구나 살고 싶은 질 좋은 평생 주택을 공급하겠다고 거들기도 했다.

    주거 복지를 위해 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단순히 주택 면적을 늘린다고 중산층이 주변의 차별 없이 만족하며 살 수 있는 임대주택이 될 수 있을까? 분양 가구와 임대 가구를 섞은 ‘소셜믹스’라는 아파트만 봐도 누구나 알아챌 수 있게 지어져 같은 단지 안에서도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차별이 이뤄지는데, 대놓고 짓는 임대단지에서 제2, 제3의 ‘엘사’가 나오지 않을 거라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사는 곳이 계급으로 굳어져 가는 현실에서 당장 임대주택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기가 쉽진 않지만, 함께 어울려 사는 사회가 되려면 임대주택을 향한 차별적 시각은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다.

    중대형 임대주택 공급이 그 첫발이 될지도 모르겠다. 소득 기준도 올리고 단지도 민간임대처럼 고급화해 가진 이들도 선택할 수 있는 단지,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집으로도 지어지는 사례가 나오면 조금씩 달라지지 않을까.

    1차 세계대전(1914~1918) 무렵 오스트리아 빈을 중심으로 노동자 주택단지를 활발히 설계하며 당시 대표 건축가로 꼽힌 후베르트 요한 칼 게스너(1871~1943)는 "가난한 이를 위한 건축은 절대 싸 보이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그가 생각한 100여년 전 가치를 지금 대한민국 임대주택 건설에 담아보는 것은 어떨까. 그때쯤이면 엘사를 애니메이션 주인공으로만 기억할 수 있을까?

    오스트리아 건축가 후베르트 요한 칼 게스너가 1911년 설계한 글로그니츠 노동자 주택 단지. /위키미디어커먼스, 토마스 레들(Wikimedia Commons, Thomas Led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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