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 시대 맞아 급속충전기 구축… 최소 30분 충전시간은 난제
유휴부지에 카페·식당 넣어 전기차 고객 잡고 임대료도 확보
주유소들이 ‘전기차 시대’를 맞이할 채비를 갖추고 있다. 그동안 주유소는 막강한 경쟁자인 전기차 인프라 구축에 소극적이었다. 자칫 잘못했다간 제살깎아먹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수분 내로 끝나는 주유 시간에 비해 전기차 충전 시간은 최소 수십분 단위로 길어 전기차 충전시설을 구비한다고 해도 경쟁력이 높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도 있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변화하는 흐름을 더는 놓쳐선 안 된다는 판단 아래 전기차·수소차 충전기 설치에 속도를 내고, 입지가 좋은 도심 주유소는 식당과 상점을 갖춘 상업용 부동산으로 개발하는 작업에 나서고 있다. 시외 주요소 역시 다각도로 활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탈바꿈하기 위해 대형화에 나섰다.
정유업계 한 관계자는 "이제 시작하는 단계라 아직 ‘복합공간’이라고 내세울 수 있는 주유소는 많지 않다"면서도 "주요 정유사들이 동시에 추진하고 있어 조만간 기존의 이미지와는 다른 주유소들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지난 7월 한국판 뉴딜을 발표하면서 2025년까지 전기차 113만대, 수소차 20만대를 보급하겠다는 청사진을 세우고, 전기차를 휴대폰처럼 수시로 충전할 수 있도록 충전기 설치를 확대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동안 미흡한 충전 인프라가 전기차 대중화에 걸림돌이 됐다는 지적을 정책에 반영한 것이다.
주유소들도 이런 정책 기조에 발맞춰 충전기 도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현대오일뱅크는 현재 직영 주유소 20곳에 운영 중인 전기차 충전소를 2023년까지 200곳으로 확대하기로 했다. 회사 측은 "접근성이 좋은 도심권 주유소를 중심으로 내년부터 100㎾급 이상 고속충전기를 설치할 예정"이라고 했다.
현대오일뱅크는 지난해 7월 충전기 제조사인 차지인과 손잡고 전기차 충전시설 사업 진출을 선언한 바 있다. 회사는 주유소 외에도 수요가 늘고 있는 전기 화물차시장 선점을 목표로 유통업체 물류센터에 전용 충전소를 설치하고, 스타벅스나 맥도날드 같은 식음료 기업이 운영하는 드라이브스루(drive-through·자동차를 타고 비대면으로 식음료를 구매하는 방식) 매장과 대형 편의점에도 충전기를 구축할 계획이다.
그러나 운전자가 급속충전기에서 80%까지만 충전한다고 해도 30분은 기다려야 한다. 내연기관차에 휘발유를 넣을 경우 몇 분 걸리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긴 시간이다.
그래서 서울 시내 ‘알짜’ 주유소를 식당과 상점 등 편의시설을 갖춘 복합 공간으로 개발하려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전기차가 충전되는 동안 운전자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GS칼텍스는 뛰어난 입지와 상권에 자리한 주유소를 상업용 부동산으로 개발하기로 했다. SK네트웍스로부터 SK에너지 직영주유소를 넘겨받은 코람코자산신탁도 부지 개발을 추진 중이다. 복합 공간 개발 노력에는 기름만 팔아서는 수익성을 확보할 수 없다는 현실적 판단도 담겨 있다. 기존 주유소의 수익성이 최근 몇 년 사이 급감하자, 넓은 주유소 부지에 임대료를 받을 수 있는 건물을 신축하는 방식으로 유휴 공간을 신사업 기회로 활용하려는 것이다.
GS칼텍스는 우선 서울역 인근의 역전주유소 부지에 13층 규모의 상업용 복합시설 '에너지플러스 서울로'를 구축하기로 했다. 이곳에는 전기차와 전기자전거 충전이 가능한 공간과 공유 사무실, 식당, 다양한 상점 등이 들어선다. 13층 옥상에는 ‘하늘정원’이 조성된다. 주유소 부지를 여느 생활편의 시설처럼 운영해 방문객을 끌어들인다는 구상이다.
그동안 주유소들은 유휴 공간에 편의점, 카페, 빨래방, 물류보관소, 택배 서비스 등을 운영해 모빌리티 시장의 변화에 대응해왔다.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주유소를 사람들이 찾을 수 있는 문화공간으로 꾸며 부동산 가치를 극대화한다는 계획이다.
SK에너지도 전국 3000개 주유소를 생활편의 시설을 겸비한 ‘에너지솔루션 허브’로 전환하겠다고 선언했다. 지속적인 석유 수요 감소 흐름에 대비해 주유소를 기름만 넣는 장소 이상의 공간으로 바꾸겠다는 것이다. 그 일환으로 오는 2023년까지 190개 충전소에 초급속충전기를 설치하기로 했다. 나아가 주유소에 연료전지 또는 태양광 발전 설비를 도입해 자동차와 트럭 등에 전기와 수소를 공급하기로 했다.
조경목 SK에너지 사장은 "현재 10여개의 SK에너지 주유소와 내트럭하우스에 태양광 패널을 설치해 전력을 생산하고 있는데 이를 계속 확대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정유사들은 주거밀집 지역에서 떨어진 주유소를 수소와 LPG 충전기를 갖춘 복합충전소로 전환하는 작업도 진행 중이다. 수소 충전소의 경우 현재 각종 규제와 주민 민원 등을 이유로 도심에 마련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일례로 현행 '서울지방경찰청 도로교통고시'에 따르면 수소를 실어 나를 수소튜브트레일러가 도심으로 진입할 수 없다. 경제성도 걸림돌이다. 현재 수소는 기체 상태로 저장·운송하는데, 부피가 크고 밀도가 낮아 지방에 위치한 정유사 공장에서 서울 시내까지 운반하기 비싸다는 단점이 있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세계적인 탄소중립 흐름과 친환경 정책 기조에 따라 전기차 보급이 늘면서 내년부터 주유소의 충전기 설치가 본격적으로 확대될 것으로 전망한다"며 "수소 충전소의 경우 규제 완화 등 추가적인 정부 대책이 세워지면 도심 주유소에도 설치할 계획"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