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수 칼럼] 롤모델 없음... 청년이 온다, 청년의 언어가 온다

입력 2020.10.28 07:00 | 수정 2020.10.28 11:46

김지수 문화전문기자
한동안 어른의 말, 전문가의 말에 귀가 솔깃하더니 요즘엔 청년의 말에 귀가 기울어지고 있다. 인터뷰어로서 경청이 일이라, 청력은 좀 떨어져도 귀의 방향은 신뢰하는 편이다. 귀는 세상의 민심과 함께 마음의 방향을 따른다. 마음이 없으면 들려도 못 듣고, 마음이 향하면 안 들리는 소리도 들린다. 청년의 말에 귀 기울이기 시작한 건 배우 박정민을 인터뷰했을 때부터였다.

박정민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떤 상태인지 정확히 아는, 자아의 해상도가 높은 사람이었다. 연기가 좋아 전공도 바꾸고 올인했지만, 극심한 강박증을 앓고 난 뒤 책도 쓰고 서점도 운영하며 여러 개의 스테이지에서 여러 개의 캐릭터로 살았다. 나는 그가 쓴 에세이 ‘쓸만한 인간'에서 ‘찌질하다의 반대말은 찌질했다’라는 문장을 읽고 한참을 웃었다. 충동과 반성을 오가며 억압의 레벨을 낮춘 작가 박정민은, 배우 박정민보다 훨씬 더 가볍고 눈치보지 않고 명랑했다.

서른을 넘긴 청년이 했던 말이 경험 많은 어떤 어른의 말보다 강렬하게 머릿속에 남았다. "열심히 한다고 좋아지진 않아요. 적정 포인트에서 이르러 뭘 좀 알아야 좋아지죠. 열심히 하는 건 순전히 제가 안정되기 위해서죠. 준비하지 못했다는 불안감을 없애려고요." "수렁에 빠져보니 고민한다고 해결되지 않더라고요. 아등바등한다고 좋아지지 않죠. 원하는 방향으로 쉽게 갈 수도 없어요. 그러니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도 됩니다… 요즘엔 "모든 선택의 기준은 오직 사람"이라는 것만 기억해요."

이후에 내가 만나는 청년들도 자기만의 언어로 일과 성장과 행복을 해석해 나갔다. "뭘 하면 즐거운지를 나에게 집요하게 물어야 한다"며 묻고 또 물어 음성학의 우주를 발견한 옥주현(뮤지컬 배우), "즐겁게 계속하기 위해 절대 무리하지 않는다"며 ‘완벽주의와 자기착취'를 경계했던 백현진(화가 겸 가수), "남을 이기고 싶지 않다. 세상의 정상성에 질문을 던지고 싶다"며 비주류 세상의 빛나는 기록자가 된 이길보라(다큐멘터리 감독) 등등.

청년의 언어는 ‘즐거움'과 ‘잘함'과 ‘계속함(지속가능성)'의 삼위일체 속에 있었다. 그들은 그 삼각의 평형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에게 질문하되, 닦달하기는 거부했다. 계속하기 위해 ‘즐거움’과 ‘잘함'이 충돌할 때는 저마다의 기지를 발휘했다. 옥주현은 취향의 동반자 조여정과 ‘함께’ 신세계를 팠고, 박정민은 ‘부업(서점)'과 ‘부캐(작가)’로 무게감을 분산했으며, 백현진은 ‘완성이 아니라 적정 순간에 손을 뗄 뿐’이라며 힘을 뺀 스타일로 자기 장르를 만들어갔다. 그의 노래는 가운데가 뻥 뚫린 도넛처럼 비어있으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쫀득하고 평화로웠다.

청년의 얼굴로 대표되던 영화 ‘이유없는 반항'의 제임스 딘.
가수 장기하는 ‘즐거움'과 ‘잘함'과 ‘계속함'의 평형을 ‘적절한 포기’해서 찾았다. "세상에 두각을 나타내고 싶어서 나를 관찰했고, 못하는 것을 하나둘 포기했더니 지금의 선명한 내가 남았다"고 그는 말했다. 장기하의 단념은 전념을 위한 알리바이였다. ‘못 함'을 덜어내서 ‘잘함'의 정확성을 높이니, ‘즐거움'과 ‘지속성'이 동반 상승했다. 이 과정에서 생긴 개성과 고유함은 경쟁의 끔찍한 제로섬 게임에서 그를 구원했다. 바라던대로 그는 자기가 만든 레이스에서 두각을 드러내며 산다.

청년이란 무엇인가? 청년이란 생물학적 나이와 상관없이 죽을 때까지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는 존재다. 다수가 정한 편견의 그물망에 걸리지 않고, 드넓은 생의 바다에 서슴없이 몸을 던져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싱싱한 자기 언어를 포획하는 자다. 그들은 더이상 ‘라떼는 말이야'로 녹조를 일으키는 기성세대의 간섭이나 명령에 시야를 저당 잡히지 않는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롤모델이 아니다. 청년이 원하는 것은 오직 레퍼런스와 피드백이다. 내가 던진 질문과 결과물이 길을 잃지 않도록, 정성어린 피드백으로 나침반이 되어주는 동료와 스승이다.

얼마 전 이슬아, 이길보라, 이다울 작가의 공동 북토크에서 10대 시절 이들을 가르친 글쓰기 스승 어딘(김현아)의 말에서 나는 그 단서를 찾았다. 제자들을 자랑스럽게 바라보며 스승이 말했다.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것은 언젠가 이들이 나의 동지가 될 것이라는 신뢰가 있어야 가능하다"고. ‘어딘의 글방’에서는 모두가 위계 없이 1/n의 발언권을 가졌고 교사에게도 ‘님’을 붙이지 않았다고 했다. 하고 싶은 얘기를 끝까지 써보고 서로 정직하게 비평하는 피드백 문화는, 그들을 자기 언어를 지닌 작가로 키워냈다.

넷플릭스의 CEO 리드 헤이스팅스가 쓴 책 ‘규칙 없음'에는 ‘가장 좋은 복지는 유능한 동료’라는 구절이 있다. 비범한 동료와 두려움 없이 주고받는 피드백이 훌륭한 직장의 전부라는 것. 그렇게 인재의 밀도와 다양성을 높이고 위로부터의 절차와 통제를 제거하자, 지구상에서 가장 빠르고 창의적인 기업이 탄생했다.

나를 지키는 진정성의 바탕 위해 타인을 인정하는 다양성의 자리를 만든, 지구공동체의 시민이 오고 있다.
빠르고 변화무쌍한 지구생태계에 청년이 오고 있다. 나이의 숲을 헤치고 인격의 밀도를 높이며, 청년이 오고 있다. 한때는 어려서 머리를 조아리고 배움을 구했으나, 지금은 동시대를 함께 걷는 동료의 모습으로 청년이 오고 있다.

청년이 오는 것은 그들의 질문이, 그들의 언어가 오는 것이다. 한때 ‘공무원이 꿈이고 호구를 거부하는 낯선 존재(‘90년생이 온다')’로 명명되던 청년이, 그들만의 ‘피드백 풀' 취향공동체 속에서 ‘자아의 해상도'를 높인 채 뚜벅뚜벅 오고 있다. 계몽과 위로를 양날의 검처럼 쓰는 어른의 언어(‘자기계발서’)를 뒤로하고, 자기 언어로 일상과 감정을 기록하는 정직한 청년 에세이스트의 모습으로 오고 있다. 타인의 언어로 뭉개지거나 서열화되지 않고, 오직 나 자신의 ‘즐거움’과 ‘잘함'과 ‘계속함'으로 행복의 균형을 갖춘, ‘롤모델’ 없는 씩씩한 개인주의자의 얼굴로, 그들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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