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단순한 이상주의자가 아니라 가장 위대한 실천가임을 행동으로 보여줍시다."

지난 25일 세상을 떠난 한국 재계의 대표 경영인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1993년 3월 삼성 제2창업 선언 5주년 기념식에서 한 말이다. 향년 78세로 별세한 그를 두고 뉴욕타임스는 부고 기사에서 "삼성을 스마트폰 TV 반도체 등 전자업계의 거인으로 키운 큰 사상가(big thinker)"라고 했다.

삼성생명 부회장 출신인 박근희 CJ대한통운 부회장은 이날 기자에게 신경영의 키워드를 ‘변화’와 ‘신뢰’라고 했다. 생존을 위한 변화와 리더와 조직원간의 신뢰라는 설명이다.

1993년 6월 프랑크푸르트 선언으로 대표되는 신경영은 변화의 시발점이 됐다. 매출 점유율 같은 숫자를 따지는 양(量)경영에서 질(質)경영으로 변화를 독려한 고인은 망하지 않고 2류가 일류 기업이 되는 길이라고 했다.

그는 선언에 머물지 않았다. 1993년 업무 집중력을 높이는 7.4제(7시 출근, 4시 퇴근), 불량이 발생하면 생산라인을 세우는 라인스톱제 도입과 1995년 불량휴대폰 15만대를 불태우는 애니콜 화형식 등은 과거와의 단절을 위한 신경영 충격요법이었다. "혁신하려면 과거를 폐기하라"는 경영학의 구루 피터 드러커 기업론의 실천가였다.

고인은 삼성 창업주 이병철 선대회장이 남긴 사업보국(事業報國)정신에 머물지 않고, 신경영을 통해 국제화를 설파했다. "나라가 2류라도 (기업이) 국제화를 해서 잘만 하면 일류도 될 수 있고, 특류도, 특A도 될 수 있다"고 했다. 환경 탓을 하기 전에 자신부터 변화하라는 메시지였다. "세상에 가장 좋은 제품을 가장 빨리 내놓으면 일류이고 거기에 인류애와 도덕성을 가미하면 초일류가 된다"고 했다. 삼성그룹의 글로벌 일등 제품이 20여개로 늘어난 힘이다.

《삼성웨이-이건희 경영학》을 지은 송재용·이경묵 서울대 교수는 세계 1등이 아니면 살아남기 힘든 반도체의 특성이 해외시장에서 낮은 원가로 경쟁하던 기업으로 하여금 기회를 선점하는 시장선도자 전략을 도입하고, 세계 최고를 지향하도록 했다고 했다.

메모리 반도체를 1993년 세계 1위로 키운 성공 노하우를 그룹 전체로 확산시키려는 신경영에 위기의식으로 점철된 반도체 사업의 경험과 특성이 녹아 있었다는 것이다. 타이밍과 스피드가 필요한 반도체 사업에서 생존하기 위해 막대한 투자 결정을 신속히 하는 스피드 경영도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넌다는 문화를 대체한 변화였다.

‘관리의 삼성’에서 ‘전략의 삼성’으로의 변화는 리더와 조직원간 신뢰를 바탕으로 했다. 신뢰를 떠받친 건 자율경영과 호기심에 끝까지 파고되는 학습형 리더쉽이었다. 큰 그림을 던지고 주요 의사결정을 하는 것 빼고는 전문경영인에 맡기고, 보고도 받지 않았다. 윤종용·진대제·황창규·이기태·권오현 등 스타 경영인은 그런 토양에서 탄생했다.

고인이 신경영 선언을 하는 3개월간 쏟아낸 강의록이 A4용지 8500쪽에 달했지만, 평소엔 말하기 보다는 잘 듣는 스타일이었다. 일방적인 지시보다는 ‘왜’와 ‘그래서’를 반복하며 상대를 설득시켜나갔다고 한다. 연간 1000편 이상의 비디오와 드라마를 볼 만큼 다양한 정보에 대한 습득 욕구가 강했기에 가능했다. 이미 현실이 된 자동차와 전자제품의 경계가 모호해질 것이라는 그의 예측은 이같은 융합형 정보습득이 뒷받침했다.

드러커가 중요한 리더쉽의 특징으로 꼽는 비(非)고객 정보에 대한 독해력과 학습분위기 조성에 모두 뛰어난 지도자였다. 1991년 글로벌 인재를 키워야한다며 지역전문가제를 도입한 고인은 "지금은 대리지만, 과장도 부장도 사장도 회장도 보내야한다"며 "평생 전문가, 평생 공부"를 강조했다.

"실패를 많이 하라. 자산이 되고, 강한 힘이 된다" 는 실패 예찬론은 리더를 믿고 위험을 감수하는 문화로 이어졌다.

기업인으로서 순탄치 많은 굴곡을 겪었지만 세계는 그의 경영혁신을 주목했다. 송재용·이경묵 교수는 2011년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HBR)에 삼성의 성공요인 분석 논문을 게재했다. 저자들은 HBR에 처음 논문을 쓴 한국 대학교수가 됐고, 삼성은 처음으로 HBR에 사례분석이 실린 한국 기업이 됐다.

미⋅중 갈등과 코로나19 팬데믹(감염병 대유행)으로 불확실성이 커진데다 불신이 팽배해진 시대 변화와 신뢰라는 신경영의 키워드를 우리 자산으로 키우는 것, 후대의 과제로 오롯이 남았다.

다시 27년전 1993년 3월. 이 회장의 제2창업 5주년 선언 기념사는 이렇게 끝난다.

"먼 훗날 삼성의 역사에서 여러분과 내가 함께 이 시대를 빛낸 주인공으로 기록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대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