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수의 인터스텔라] "행복하려면, 끝없이 포기에 성공해야" 장기하의 단념의 미학

입력 2020.10.24 07:00 | 수정 2020.10.26 09:32

가수 장기하 첫 산문집 ‘상관없는 거 아닌가?’
"단념과 집념 사이, 행복하려면 포기에 성공해야"
"창작의 핵심은 요약, 군더더기 빼고 리듬 뽑아내야"
"두각을 드러낼 수 없는 일엔 흥미 못 느껴"
"치열한 자기 관찰… 못하는 걸 빼면, 개성 남아"
"글도 인생도 힘주는 것 보다 빼는 게 어려워"

록밴드 ‘장기하와 얼굴들'을 마무리하고 새출발을 앞두고 있는 뮤지션 장기하의 깨끗한 얼굴./사진=장련성 기자
하루키의 에세이가 ‘맥주회사에서 만든 우롱차’라면, 가수 장기하의 첫 산문집은 ‘우롱차 회사에서 만든 맥주’ 같은 맛이었다. 깊은 탄산의 맛이랄까. 착실하게 잘 배열된 일상의 문장(마침 뮤지션 휴직 중이고 파주에 혼자 산다), 그 행간을 알싸하게 찌르는 특유의 심드렁함과 어디로 흘러갈지 알 수 없는 사유의 리듬에 적잖이 취기가 올라왔다.

일요일 오후, 야심 찬 일을 시작하기엔 좀 뭣하고 그렇다고 시간을 뭉텅이로 흘려보내기엔 아까워 읽기 시작한 책 ‘상관없는 것 아닌가?’에서, 나는 약간 당황했고 적잖이 위로받았다.

책갈피를 넘기며 그의 동선과 기분을 따라가다 보면 괜스레 센치해지기도 하고 가볍게 흥분도 했다. 메밀차를 마실까? 식은 밥을 먹을까? 빵을 먹을까? 맥주도 한잔할까? 그가 알덴테로 라면을 끓이거나 총각김치를 자를 때의 사각하는 가위 소리가 좋다고 할 땐, 면가닥을 들어 올리는 젓가락이나 가위를 잡은 손아귀의 힘이 느껴졌다.

기록하기 위해 감각하는 일상이란 얼마나 농밀한가.

그는 느끼고 썼다. 석양이 비쳐드는 도심 고속도로를 달리거나 사막의 별빛 아래 홀로 노숙하거나, 홀로인 듯 홀로이지 않으며 결국 홀로인 우리 존재의 충만과 결핍에 대해. 비틀스의 ‘애비로드'를 듣다가 불현듯 어린 시절 함께 놀던 세라 누나가 가버렸을 때의 슬픔이 몰려오는 우리의 출렁이는 감정에 대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입자로 흩어질 뿐인 죽음에 대해.

장기하는 나지막이 읊조렸다. 좋았던 순간조차 문득 두려운 건, 그것이 그리움이 되고 슬픔이 되기 때문이라고. 나는 은테 안경 너머로 또렷하게 빛나는 마흔 즈음의 검은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충만한 일상을 누린 후의 이 개운한 사나이를.

석탄처럼 검은 머리에 찌를듯이 형형한 눈동자를 가진 장기하./사진=장련성 기자
장기하를 만났다. 단념하는 자아와 전념하는 자아를 한 몸에 지닌 효율적 모범생. 한번 사는 인생, 두각을 나타내고 싶었다는 정직한 사내. 두각을 나타내기 위해 못하는 걸 하나씩 포기하고 나니, 지금의 선명한 자기가 남았다고 했다. 행복하고 싶어서 특이해지는 걸 선택했고, 특이해지기 위해 자신을 맹렬하게 관찰했다.

-페이스 디자인이 정교하군요. 짧은 머리카락과 턱수염 말입니다.

"감자처럼 보인다고도 해요(웃음). 수염을 길렀다 밀었다 여러 단계를 거쳐서 지금의 편안한 길이에 이르렀어요."

-체크무늬 분홍 셔츠도 잘 어울려요.

"한때는 ‘연예인답게' 입으려고 노력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상관없는 거 아닌가.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내가 연예인다워서 좋아하는 건 아니잖아.’ 그래서 ‘옷이 왜 그따위야?’ 소리를 듣지 않을 정도의 편안한 선을 찾았어요."

-그러니까 장기하 씨는 지금 디자이너처럼 보입니다. 늘어놓은 것을 정리해서 에센스만 정확하게 배치해놓은 디자이너… 슈퍼 노멀, 비범한 평범의 상태지요.

"(반색하며)제 접근방식이 그래요. 음악을 만들 때도 글을 쓸 때도 핵심만 붙잡아서 리듬을 추출해요. 군더더기는 싹 빼내죠."

-군더더기를 안 좋아하는군요!

"네. 그걸 인지하고서도 내버려 두는 경우는 없어요. 창작에서는 군더더기를 빼는 게 정말 중요해요. 저는 창작은 결국 요약이라고 생각해요. 핵심을 남기고 나머지는 버리는 거죠. 저마다 포착하는 핵심이 달라서 서로 다른 요약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디자이너 출신인 카카오 대표 조수용과 크리에이터 정구호도 그러더군요. 더하기보다 빼기가 아이덴티티를 만들어낸다고요. 너무 많은 공을 던지면 소비자는 받아내지 못한다는 거죠.

"음악, 미술, 연극, 문학 다… 매개체를 통해서 감흥을 일으킨다는 점에서 다를 바 없죠. 동어반복을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글쓰기에서는 모르면서 단언하는 것, 짧게 쓸 수 있는데 늘여 쓰는 것 등등. 음악도 장르의 클리셰나 편견이 있으면 불필요한 걸 못 빼요."

“다들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로 골을 싸매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한두 개 쯤 그런 짐을 덜어낼 수 있다면, 단 1g이라도 가볍게 살 수 있지 않을까요.”/사진=장련성 기자
-일상에서 군더더기는 뭐죠?

"너무 많이 먹는 거죠. 식탐이 많아서 어릴 때는 먹을수록 기분이 좋았는데, 지금은 아니에요. 과음하거나 과식하면 찌꺼기만 쌓여요. 그럴 땐 ‘왜 이러고 사나' 자괴감이 듭니다. 요즘엔 쓸데없이 비싼 물건을 사거나 소유하는 것도 군더더기처럼 느껴져요."

-첫 산문집 ‘상관없는 거 아닌가?’는 한 편의 긴 노래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에세이 문장이 일상의 운율과 리듬을 품고 있더라고요. 당신이 노래 부르듯 나도 흥얼흥얼 읽어보았습니다. 혹시 당신도 그렇게 흥얼흥얼 썼나요?

"(멋쩍게 웃으며)쓸 때는 솔직하게 의미를 전달하는 게 목표였어요. 퇴고할 때는 소리 내 읽어봤지요. 자연스럽게 들려야 잘 짜인 문장이니까요."

-노래를 만들 때는 어떤가요?

"음악 창작은 대개 순서가 있어요. 먼저 멜로디를 만들고 거기에 의미 없는 발음을 붙여서 노래 꼴을 만들죠. 그다음에 발음에 잘 붙는 가사를 써요. 저는 좀 달라요. 어느 날, 한 문장이 스르르 다가와요."

-문장이 다가온다?

"네. 예를 들어 ‘싸구려 커피'는 ‘싸구려 커피를 마신다'라는 문장이 쑥 나왔어요. 가사의 첫 줄이 올 때도 있고 후렴구가 올 때도 있어요. ‘삼거리에서 만난 사람'이나 ‘달이 차오른다, 가자' ‘그건 니 생각이고' 이런 노래들은 다 실마리가 되는 문장이 먼저 왔어요."

-왜 당신에겐 멜로디가 아니라 가사가 먼저 왔을까요?

"(잠시 생각하다)사실 저는 작곡가와 가수가 될 생각이 전혀 없었어요. 리듬을 치는 드러머로 어떻게 연주를 잘할까,하는 생각만 했죠. 그런데 의외로 좋은 드러머가 되겠다는 생각이, 음악을 대하는 자세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 싶습니다.

리듬을 인지하는 섬세함이 말이 가진 운율을 알아챌 수 있도록 이끌었달까요. 드럼 연습을 열심히 해본 사람은 다 알아요. 선생님이 "이건 정박이지만 빠른 거야, 이건 정박이라도 약간 느린 거야"라도 할 때의 차이를. 처음엔 다 똑같아도 점차 그 차이가 다 들리거든요."

-미묘한 스윙을 캐치하는 건가요?

"그렇죠. 그게 드러머의 능력이에요. 귀와 손으로 그 스윙을 찾아가는 거죠."

“20대에는 20대 다운 노래가 나왔고 30대는 30대다운 노래가 나왔어요. 곧 40대 다운 노래가 나오겠지요.”/사진=장련성 기자
-그 촉으로 언어의 음악성을 찾아갔군요.

"네. 하지만 언어의 음악성은 음표에서 비롯된 게 아니에요. 생활 언어에서 추출된 거죠. 저는 드러머로 연습한 신체 기능을 잘 활용해서 언어의 음악성을 하나씩 추출해 간 거예요. 이미 말속에 있는 음악성을 건져서 밖으로 꺼내는 거죠.

가령 ‘우리 지금 만나' 같은 노래도 생활에서 건진 노래예요. 전화하다가 답답하면 만나자고 하잖아요. 그때 ‘우리 지금, 만나' 이렇게 한달음에 훅 나와요. 그 억양을 음계로 표현하면 ‘도도레레라라' 정도예요. 말 자체가 음계와 리듬을 이미 품고 있는 거죠. 대개는 피아노와 기타 출신이 노래를 만들어요. 저처럼 드러머 출신의 싱어송라이터가 많지 않아요. 그래서 제 노래의 개성이 나온 게 아닌가 싶어요."

-‘그러게 왜 그랬어?’ 같은 노래는 마치 배우처럼 노래하더군요. 감정도 발성도 명료해서 놀랬어요.

"‘가사를 재밌게 써야 한다’는 생각은 기본적으로 갖고 있었죠. 그런데 재밌게 쓴 가사도 클럽 같은 공연 환경에서는 전달이 잘 안되더라고요. 그러면 방법은 하나죠. 쓰는 단계에서 전달력을 염두에 두고 문장을 만들어야 해요."

-전달력을 염두에 둔 문장이란 뭐죠? 어떻게 써야 말하듯이 들리나요?

어느날 김창완의 노래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가 참 아름답게 들려왔다고 했다. 거기서부터 한글 운율의 마법을 발견했다.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는 ‘ㄴㅁㅇ’이라는 울림소리를 잘 활용한 노래였어요. 울림소리는 ‘음'하고 울리는 음이에요. 반면 안울림소리는 ‘같, 받, 꽃'처럼 끊기는 소리죠. 한국말 노래를 부를 땐 이 울림소리에서 부드럽게 가고 안울림소리에서 끊기고 멈춰요. 우리말로 쓴 노래는 가고 멈추는 것을 배치하는 데서 오는 음악성이 아주 커요. 운율의 핵심은 흔히 쉽게 생각하듯 모음의 규칙성을 맞추는 게 아니었어요(웃음)."

-그런데 요즘 가수들은 우리말 발성을 외국어처럼 하더군요. ‘팝처럼 들리는 게' 더 근사해 보인다는 거죠.

"언어 간에 자연스럽게 섞이는 건 좋지만, 일방적으로 영어의 영향을 받는 건 좀 거북해요. 그러면 노래가 일상과 분리돼요. 한글에는 R 발음이 없는 데도 그 발음을 내고, 무리하게 라임을 맞추려고 두 음절을 한 음절로 바꿔요. 도치법도 쓰죠. 그걸 제가 윤리적으로 판단하기보다는… 뭐랄까, 그러면 우리말이 더 재미없어지는 거 아닌가, 그 정도의 생각을 합니다."

영혼까지 끌어올려 잘생기고 싶은 게 연예계의 상식이지만, 거기서 벗어나 청개구리처럼 살고 싶다는 요즘의 장기하./사진=장련성 기자
-산문집에서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느긋한 리듬이 느껴졌습니다. 마치 장기하의 노래에서 산울림의 그림자를 발견한 것과 같달까요.

"(활짝 웃으며)고맙습니다. 하루키의 영향을 받았어요. 소재 고갈이 올 때마다 하루키의 에세이를 읽으며 반성했죠. 이렇게 사소한 소재로도 글을 쓸 수 있다니. 일상에 무궁무진한 소재가 있구나!"

-에쿠니 가오리는 노란 고무줄 하나에 대해서도 쓰죠. 일본 작가들은 사소한 것의 뉘앙스를 놓치지 않아요. 하이쿠의 바탕이 튼튼합니다.

"일본스러움을 추구하진 않지만, 군더더기 없고 헛웃음이 나오는 정도의 위트가 참 좋습니다."

-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장기하의 글과 노래에는 오래된 동시대성, 익숙한 독창성의 냄새가 나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따라 한 게 많아요. 노래도 산울림을 따라 했다는 걸 숨기지 않아요. 나는 따라 한 사람이다, 산울림과 송골매라는 정확한 레퍼런스가 있다,고 떠들었죠. 그렇게 대놓고 말하니 음악 팬들은 ‘속았다’고 느끼지 않아요. 저도 속인 적이 없어요. 가사만큼은 내 삶을 관찰해서 내가 쓴 거니까요(웃음)."

베꼈지만 다른 것. 껍질은 외갓집 참외처럼 친숙하지만, 알맹이는 더 달고 찝찔한 것. 새로운 닮은꼴. 그것은 부모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자식의 모습이 아닐까. 아들이 아버지의 염색체를 복제하듯 그는 하루키의, 김창완의 예술적 DNA를 흡입했다. 나는 그가 이 시대에 어울리는 매우 효율적인 천재라고 느꼈다.

이 효율적인 천재는 좋은 걸 따라 하는 것도 잘하지만, 단념과 포기에도 능했다. 이유 없이 손 근육이 마비되는 ‘국소성 이긴장증’이라는 병을 앓자 프로 드러머의 꿈을 포기했고, 기타도 못 칠 상태가 되자 작곡과 보컬에 전념했다.

장기하에게 단념은 전념을 위한 반가운 알리바이처럼 보였다.

미니멀한 39살의 청년 장기하./사진=장련성 기자
-짧게 절망한 후 자기를 잘 ‘설득해서’ 생의 방향을 트는 건, 타고난 낙천성인가요?

"아닙니다. 사람들은 제가 초연한 줄 아는데, 아니에요. 반대로 욕심이 너무 많아요. 이를테면 저는 학창 시절 체육을 못 해서, 체육을 안 했어요. 혼나면서도 기어이 포기했죠. 뭐랄까, 저는 제가 두각을 나타낼 수 없는 일에는 흥미를 못 느끼는 인간이 아닌가 합니다."

-두각을 나타내고 싶다…

"네. 두각을 나타낼 수 없는 건 다 포기해요. 세상에 잘하는 사람은 너무 많고, 잘하지 못하면 고통받으니 신속하게 단념하는 거죠. 돈에 욕심을 안 부리는 건 재력에 두각을 나타낼 자신이 없어서예요. 저는 가창력에도 두각을 나타낼 수 없어요. 그렇게 하나둘 포기하다 보면 알게 돼요. 최고가 없으면서 내가 1등 할 수 있는 분야는 개성이라는 걸. 개성을 살리면 두각을 나타낼 수 있겠구나! 나 혼자 게임 해서 1등을 해야겠구나! 이를테면 축구가 아니라 혼자 뛰는 달리기를 선택하는 거죠."

-두각을 나타내고 싶어서요?

"그렇죠. 잘 못하면 특이하기라도 하자는 거죠. 그런데 특이한 게 쉬운 게 아니에요. 자신을 맹렬하게 관찰해야 합니다. 타고난 게 나밖에 없으니, 나를 잘 살려야죠."

-그런 방식으로 효율적인 관찰의 천재가 됐군요!

"천재는 김창완이죠. 하루키도 김창완과 비교하면 노력파로 보여요. 저는 서태지 키즈, 패닉 키즈로 자랐지만 ‘눈뜨고 코베인'밴드에서 드러머로 활동하면서 산울림, 비틀스의 노래를 기본 교양으로 이수했어요. 그들의 천재성에 완전히 빠졌죠

제 평생의 자랑이 뭐지 아세요? 김창완 선배님이 제게 해준 말이에요. "기하야, 넌 내가 밉지?" "제가요? 왜요?" "원래 아들은 아버지를 미워하거든." 하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미묘하다는 거죠."

부전자전이라고 했던가. 장기하의 아버지도 대학 시절 밴드에서 베이스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그는 자신이 아버지의 음감을 물려받았다고 했다.

-부모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억압도 하지 않았고 방임도 하지 않으셨어요. 공부를 잘하길 유도했지만, 제가 공부를 열심히 했던 건 그걸로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기 때문이에요. 학교 시험 잘 보는 건 할 수 있는 일 같더라고요. 성적이 잘 나오면 기분도 좋았고요."

그는 서울대 사회학과를 나왔다. 패닉으로 활동했던 가수 이적의 8년 후배다.

단념과 전념 사이에서 효율적인 힘주기를 해온 장기하. 핵심만 리드미컬하게 남았다./사진=장련성 기자
-좋은 학벌이 당신 인생에 영향을 미쳤나요?

"서울대에 가보니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이 가득했어요. 내 또래 청년이 기형도는 물론 웬만한 문학 전집을 다 읽었더라고요. 나만큼 책을 안 읽은 사람이 없었어요. 결론은 겨룰 수 없는 일엔 노력하지 말자. 저는 고효율을 추구해요. 사람이 가진 게 다 거기서 거긴데 어디다 힘을 쓸지 효율적인 결정을 해야 한다고 봐요.

사실 진짜 테스트는 사회에서 시작되는 것 같아요. 사회에 나오면 시험 범위가 없잖아요. 그런데 고학력자들은 1등을 못 하면 굉장히 당황해요. 심리적인 대비가 안 돼 있거든요. 그때 자기만의 대처법을 찾아야 해요. 안되는 게임은 포기하고 범위가 작아도 내가 1등 할 수 있는 게임을 만들어야죠. 저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지금의 그라운드를 찾았어요. 행복하게 살아야 하니까 내 방법을 찾은 거죠."

생각해보면 국소성 이긴장증이라는 병도 드러머로 두각을 나타내기 위해서 과도하게 높은 기준을 자신에게 부과하면서 나온 스트레스 반응이었다고 부연했다. 결과적으로 드럼 대신 화려한 스윙으로 자음과 모음을 배열하는 일, 싱어송라이터의 일이 장기하에게 가장 행복한 트랙이 됐다.

-문득 궁금하군요. 당신에게 좋은 노래는 화성인가요? 문장인가요?

"문장이요. 내 음악은 언어에 대한 나의 태도에서 시작했어요. 그건 나의 세계죠. 반면 좋아하는 노래는 가사를 신경 쓰지 않아요. 어떤 노래는 가사를 알아듣지 못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언어의 의미가 아니라 소리만으로 아름답거든요. 밥 딜런의 노래, 라디오헤드의 노래는 말소리의 흐름만으로 황홀해요. 그것이 마치 장기하 노래를 가사를 모른 채, 그러니까 알맹이를 쏙 빼고 듣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싶겠지만, 하여간 그래요(웃음)."

-팬덤에 대해서는 어떤가요? BTS의 아미가 부러울 때도 있나요?

"아미가 대단하지만 부럽지는 않아요. 그 정도의 팬덤은 저의 행복을 위해 일찌감치 포기했어요. 추구하지 않는 영역입니다. 하지만 팬들은 장기하의 중요한 동력 중 하나예요. ‘별일 없이 산다' ‘그건 니 생각이고' 이젠 ‘상관없는 거 아닌가'라는 책까지 내니, 제가 인기에 연연하지 않은 줄 아는데, 아닙니다."

자신만만함과 ‘뻘쭘함' 사이의 미묘한 밸런스, 한 첫 산문집 ‘상관없는 거 아닌가?’.
-연연한다는 말인가요?

"네! 저는 사랑받고 싶은 사람이에요. 창작하는 사람은 대단한 예술혼을 지닌 사람이 아니라 사실 더 사랑받고 싶은 사람이에요. 주변 몇몇 사람의 칭찬이 성에 안 차서 더 많은 주목을 받고 싶은 사람들이죠. 그런 면에선 저나 BTS가 다를 바 없어요. 순수미술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죠. ‘난 사람들이 관심 안 가져도 상관없어’라고 하는 분들을, 저는 믿어요. 하지만 의심합니다(웃음)."

그 자신, 다른 사람들과 캐릭터가 겹치지 않아 ‘여기는 내 땅이다' 깃발을 꽂았지만, 그 또한 상징일 뿐 금세 사라질지 모르는 물거품 같다고 했다. 행복에 뾰족한 수는 없다고. 상대적으로 많은 이들이 쫓는 가치를 따라 사는 사람들이 더 행복할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주저한다기보다 결론을 내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든 결론을 내는 순간 이상해져요. 대화도 어려워지고요."

어떤 결론을 내리기보다 제 각자 결심을 할 뿐이라고. 우리는 신념의 허무함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언제든 ‘뒤집힐 수 있고 틀릴 수 있다'는 전제로 연구하는 과학자들의 태도가 결국 예술가의 태도가 아니겠느냐고. 아름다움이 결론을 내릴 수 없는 것처럼.

나는 그에게 우주의 블랙홀에서 나는 수벌의 윙윙 거리는 소리가 음악적인 파동을 갖고 있다고 말해주었고, 그는 종로서적을 운영했던 할아버지와의 추억을 들려주었다. 할아버지 댁 마당에서 피어오르던 캠프파이어와 불 속에서 너울거리던 노인의 ‘칠갑산'과 손자의 ‘하여가'가 얼마나 멋진 하모니를 이뤘는가에 대해.

각도에 따라 미묘하게 뉘앙스가 달라지는 장기하의 얼굴./사진=장련성 기자
스스로에 대한 과장이나 오해 없이 그저 물처럼 햇빛처럼 자신을 감싸고 비춰주는 삶.

통증이 일상을 덮을 때, 사람들은 그 상황을 설명해줄 ‘더 나은 언어'를 갈구한다. 고통이 어디에서 왔고, 얼마만큼 머물다 어디로 흘러갈지. 그럴 때 언어는 진통제다. 장기하의 언어는 진통의 세계에서 한 뼘 더 나아가 각성의 세계로 우리를 이끈다. 불투명한 일상과 감정을 성실하게 닦아 기어이 ‘더 말갛고 선명한 언어'를 내놓으며.

-어떻게 스스로에 대한 과장과 오해에서 벗어났나요?

"오르락내리락 반복하죠. 나에 대해 과장하고 오해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늘 포기에 성공하진 않아요. ‘상관없는 것 아닌가'라고 스스로 선언해야 하는 순간들이 얼마나 많았기에 이런 제목의 책까지 썼겠어요(웃음).

저도 BTS나 아미가 부럽진 않지만 나보다 조금이라도 잘 나가는 사람은 다 부러워요.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을 찾았다고는 해도, 한눈 팔면 역시나 또 부러워져요. 나는 망했고, 나는 가망 없고 나는 실패한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이는 걸요(웃음).

그래도 10년 넘게 뮤지션으로 잘 살아남은 이유는, 완전하진 못해도 60~70% 확률로 포기에 잘 성공해왔기 때문이에요. 운 좋게도, 과욕을 부리지 않을 수 있는 정도로, 포기에 성공했어요."

-드럼을 포기했어도 여전히 드럼을 사랑하지요?

"밴드를 하게 됐을 때는 그나마 박자를 잘 아는 사람이 저밖에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드럼을 쳤죠. 그런데 이 드럼이, 참 매력 있어요. 아무나 할 수 있거든요. 그런데 아무나 다 잘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또 그럭저럭 알게 돼요. 모두가 잘할 필요는 없다는 걸. 그런데 저는 잘하고 싶었고,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어쩌면 드럼이라는 악기보다는 밴드 합주를 잘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정확한 박자로 연주하는 느낌. 자기 자신의 사지로 합주하면서 호흡이 맞아가는 즐거움. 손과 발이 같은 리듬을 타고 움직이는 건 마치 춤추는 것과 비슷해요. 온몸으로 리듬을 감각하는 과정은 참 즐겁습니다. 하하."

-사막에서 홀로 노숙할 땐 행복했나요?

"너무 좋았어요. ‘mono’라는 곡을 혼자 녹음하겠다고 고즈넉한 곳을 찾아 사막까지 갔었어요. 원래 목표한 만큼 녹음이 잘 되진 않았지만, 저는 사막의 밤을 겪었고 거기서 매일 혼자 노래를 부르며 더 잘하게 됐어요. 서울로 돌아와서 알았죠. 연습하면 나도 실력이 느는구나(웃음)."

-에세이 쓰기는 정신의 필라테스라고 했어요. 마음의 체형을 다듬는 데 무엇이 중요하던가요?

"힘 빼기요. 불필요한 힘을 빼고 동작에 집중해야 해요. 노래도 마찬가지고 연기도 마찬가지죠. 연출가가 저에게 한 디렉션이 딱 그랬어요. 쓸데없는 데 힘을 빼고 몸을 편안히 한 후 필요한 감정만 눌러주라고요. 글도 인생도 힘을 주는 것보다 힘을 빼는 게 어려워요."

장기하는 지금도 변화하며 흘러가는 중이다/사진=장련성 기자
-‘싸구려 커피'로 얻은 것과 잃은 것은 무엇인가요?

"얻은 것은 히트곡 타이틀, 잃은 것은 기괴한 즐거움."

-무대 위의 장기하는 어떤 사람입니까?

"물 만난 물고기죠. 자존감이 가장 높아진 인간."

-글 쓰는 장기하는 어떤 사람인가요?

"요놈 봐라. 이런 놈도 있었네."

-달리기는 당신을 어디로 데려다 주나요?

"요즘엔 족저근막염에 걸려서 달리기를 못 해요."

-국소성 이긴장증이 그랬듯 족저근막염도 당신을 더 좋은 곳으로 데려다 주겠지요.

"고난이나 제약이 반드시 새로운 길로 데려다주진 않아요. 중요한 건 고난이 나를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뜨릴 거라는 보장은 없다는 거죠. 분명히 희망적인 미래로 보내주지도 않아요. 다만 망했다는 증거는 아닐 수 있다, 우연한 계기로 더 좋은 걸 찾게 될 수도 있다, 정도. 자기 의지로 산 것 같지만 흘러가고 흘러오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댄서 리아킴이 그랬던가. ‘박치는 없다, 자기만의 리듬이 있을 뿐’이라고. 장기하를 만나고 나는 사람의 인생도 저마다의 운율로 흘러가는 개울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련기사를 더 보시려면,

[김지수의 인터스텔라] "항암치료, 환자가 죽어간다... 암, 꽁무니의 말고 머리 찾아야" 종양 권위자의 양심 선언 김지수 문화전문기자
[김지수의 인터스텔라] "아이는 부모를 항상 용서한다" 오은영의 정확한 사랑의 언어 김지수 문화전문기자
[김지수의 인터스텔라] "내 종교는 효도교, 어머니 눈물값으로 산다" 임지호 셰프 김지수 문화전문기자
[김지수 칼럼] 롤모델 없음... 청년이 온다, 청년의 언어가 온다 김지수 문화전문기자
[김지수의 인터스텔라] "타인의 기대를 떨어뜨리라" 인정 강박에 지친 당신에게 김지수 문화전문기자
[김지수의 인터스텔라] "괜찮아! 경험" 학교는 자퇴, 유학은 펀딩... 반짝이는 비주류, 이길보라 김지수 문화전문기자
[김지수의 인터스텔라] "한국인들, 세상 바꿀 자격 있어... 낡은 야망 죽이라" 잭 콘필드 김지수 문화전문기자
[김지수의 인터스텔라] "희망 버려야 살 길 생겨, 코로나 2~3년 더...생활 태도 바꿔라" 김지수 문화전문기자
[김지수의 인터스텔라] "코로나 암흑? 지금은 2025년... 디지털로 인생 재시동 걸 황금 기회" 김지수 문화전문기자
[김지수의 인터스텔라] "여자는 어떻게 투명인간이 되었나" 젠더 데이터 공백에 관한 충격 진실 김지수 문화전문기자
[김지수의 인터스텔라] "내가 불 속에 뛰어드는 이유" 노숙자에서 英최고위 소방대장 된 이 사람 김지수 문화전문기자
[김지수의 인터스텔라] "도심 한가운데 택배 지하 터널 뚫고 학교엔 테라스 만들어야" 유현준 김지수 문화전문기자
[김지수의 인터스텔라] "낯선 사람이 더 안전하다...타인 믿어야 유익" 말콤 글래드웰 김지수 문화전문기자
[김지수의 인터스텔라] 김훈 "인간의 시비(是非)는 끝이 없어... 나는 더 친절해지려 한다" 김지수 문화전문기자
[김지수의 인터스텔라] 이정현, 우리 시대의 성실한 앨리스 "잘 먹고 잘 자야 창조성 커져" 김지수 문화전문기자
[김지수의 인터스텔라] "즐거움 좇아 계속 하며 산다" 김완선의 인생 그루브 김지수 문화전문기자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