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배터리 이전투구' LG와 SK는 뭘 믿고 그렇게 다투나?

조선비즈
  • 최지희 기자
    입력 2020.10.06 14:40

    1년 6개월째 미국에서 배터리 소송전을 벌이고 있는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이 최근 서로를 향한 비난 수위를 높이며 장외 비방전을 이어가고 있다. 상대를 비판하는 입장문도 잇달아 내고 있다. LG화학이 "파렴치한 행위를 한 SK이노베이션은 언론 플레이를 멈추라"고 하면, SK이노베이션은 LG화학을 향해 "‘소송 갑질’을 멈추라"고 하는 식이다. 두 기업의 감정의 골은 깊어질 대로 깊어져 서로를 코너로 몰아세우고 있다. 세계 배터리 시장을 선도하고 있는 국내 기업들이 이렇게 진흙탕 싸움을 벌이는 건 근래 보기 드문 일이다.

    배터리 영업비밀 침해 소송을 맡은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의 최종 판결이 이달 5일에서 3주 뒤로 미뤄졌을 때, 업계에선 "협상 시간을 벌어 양사에 호재"라는 의견이 우세했다. 하지만 양측은 여전히 상대가 요구하는 배상금이 터무니없다며 불편한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LG화학 측은 "수백억원대 합의금을 제시하고 없던 일로 하자는 게 말이 되느냐"고 했고, SK이노베이션 측은 "영업이익 침해 근거도 명확히 제시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합리적인 협상이 가능한가"라고 맞받아쳤다.

    ‘영업비밀 침해’ 조기 승소 판결을 받은 LG화학이 SK이노베이션과의 합의 없이 최종 판결에서 이기더라도 소송은 장기화할 가능성이 크다. SK이노베이션이 판결에 불복해 미연방고등법원에 항소하거나 공탁금을 내고 미 행정부에 60일간 리뷰를 신청하는 등의 선택지가 있기 때문이다. 소송 장기화에 따른 불확실성 증대는 두 회사에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배터리 공장 설립과 차세대 제품 개발 등에 막대한 투자 자금이 필요한 상황에서 이미 양사는 소송에만 4000억원가량을 지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쟁이 치열한 세계 배터리 시장에서 불확실성은 경쟁력 약화를 의미한다. 법적 공방이 길어지면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은 배터리 공급 차질 등 불확실성을 피하기 위해 다른 공급사를 찾으려 할 것이다. 이미 중국 1위 배터리업체 CATL은 기존 한국 업체들의 주요 고객사였던 자동차 회사들과 연달아 협력 계약을 맺고 있다. 세계 1위 자동차 그룹인 폭스바겐을 비롯해 독일 다임러 그룹, 미국 전기차 업체 테슬라 등도 LG와 SK의 배터리 비중을 줄이고 중국 등으로 공급처 다변화에 나섰다.

    오늘날 글로벌 시장의 경쟁 구도는 개별 기업 간의 1대1 싸움이 아니라 생태계에 기반한 팀 간의 싸움이다. 유럽은 안보 차원에서 배터리 산업 생태계 조성에 팔을 걷어붙였다. 미래 핵심 사업인 전기차 배터리 수급을 타국 기업에 의존할 경우 자국 자동차 산업을 비롯해 일자리까지 타격을 받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들이 한국 배터리 업체를 대신할 체계를 갖추면 세계 배터리 시장 1위 LG화학을 비롯해 각자도생 중인 국내 기업들의 활약은 한낱 신기루가 될 수 있다.

    ‘더 큰 것을 잡기 위해 상대를 극단으로 치닫게 하지 않는다’는 의미의 욕금고종(欲擒故縱)은 병법 36계 중 16번째 가르침이다. 적을 너무 몰아붙이면 적도 필사적으로 반격하므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막다른 길은 피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현재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이 벌이고 있는 국내외 소송은 10여건에 달하지만 날 선 말만 오갈 뿐 생산적인 협의는 선택지에서 지워진 지 오래다. 우물안 개구리 싸움을 하다가 기업이 도태되는 것은 한순간이다. 세계 시장에서 끝까지 살아남기 위해서 협력하고 투자해 ‘K배터리 생태계’를 가꾸어 나가는 것이 LG와 SK가 진정 몰두해야 할 일이 아닐까. 세계 1위라는 숫자에 취해 있는 동안 위기는 이미 곁에 더 가까이 다가왔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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