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미조선]
여성 영화인들이 말하는 한국 영화계
"다양한 소재와 플롯 담아야 여성 영화 발전"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속에서 극장가가 조심스럽게 되살아날 기미를 보인다. 올해 하반기 극장가의 키워드는 ‘여성 히어로’다. 9월 17일 디즈니의 뮬란 개봉을 시작으로 마블스튜디오의 블랙위도우, 워너브라더스의 원더우먼1984가 스크린에 등장할 예정이다. 뮬란은 개봉을 전후해 사회적인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주연 배우 류이페이(유역비)의 홍콩 경찰 옹호 발언, 신장 지역 감사 표현이 문제가 된 것. 그러나 뮬란 캐릭터와 영화가 주는 메시지의 긍정적인 의미마저 정치·사회적인 이유로 비난당해서는 곤란하다. 남성 주인공 일색이었던 영화계에 다양성을 반영하겠다는 반성의 선언과도 같기 때문이다. ‘이코노미조선’ 364호에선 ‘여성 히어로의 시대’를 다뤘다. 니키 카로 뮬란 감독 인터뷰, 디즈니 최초 여성 시나리오 작가 린다 울버튼 감독 인터뷰, 여성 히어로 영화의 역사, 여성 영화인 대담을 담았다. [편집자 주]
1919년 개봉한 무성영화 ‘의리적 구토(감독 김도산)’부터 시작된 한국 영화의 역사는 지난해 딱 100년을 맞았다. 한국 최초 여성 감독의 영화는 박남옥의 ‘미망인(1955)’. 미망인은 오로지 딸을 위해 거친 세파를 이겨내는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국내에 영화 산업이 태동한 후 36년이 지나서야 여성 감독의 영화가 나왔지만, 이 역시 박남옥의 데뷔작이자 마지막 작품으로 영화사(映畫史)에 기록됐다. 이후 1990년대 전까지는 10년마다 한두 명꼴로, 여성 영화감독이 극히 드물었다. 그렇다면 현재는 과연 어떨까.
‘이코노미조선’이 9월 9일 1980년대 후반 영화계에 뛰어들어 여전히 맹활약하고 있는 영화 제작자 심재명 명필름 대표, 최근 활발한 활동을 보이는 신예 감독 한가람 그리고 2019년 흥행작 ‘82년생 김지영’의 각색가 김효민 작가 등 3명의 여성 영화인을 전화 및 서면으로 인터뷰해 지상 대담으로 꾸렸다.
심 대표는 한국 영화 르네상스를 이끈 명제작자다. ‘접속(1997)’ ‘공동경비구역 JSA(2000)’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2008)’ ‘카트(2014)’ 등 평단과 대중의 호응을 고르게 받은 영화를 꾸준히 제작했다. 그는 올해 창립 20주년을 맞은 여성영화인모임 이사로 활동하며 여성 영화인들의 권익 향상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여성 감독 임순례와 함께 2018년 개관한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 공동 센터장도 맡고 있다.
심 대표의 활동 초창기에는 1950년대 영화계 활동을 시작해 1980년대 외화 수입과 한국 영화 제작까지 겸한 원로 배우 김지미(1940~)와 이미례(1957~, 현 씨맥스픽쳐스 대표) 감독 정도가 여성 영화인으로 부를 수 있을 정도였다. 심 대표는 "영화계에 처음 뛰어들었을 때 사람들은 나를 ‘미스 심’이라고 부를 정도로 젠더(성)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라고 했다. 그는 이어 "지금은 영화 홍보 마케팅 인력의 90%가량이 여성이며,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킨 굵직한 여성 영화인들의 작품이 속속 선보이고 있다"라고 덧붙였다.
한 감독은 지난해 개봉한 장편 영화 데뷔작 ‘아워바디’를 통해 이름을 알렸다. 이 영화는 행정고시 8수 끝에 어느덧 30대로 접어든 주인공 자영(최희서)이 홀로 달리기를 하다 동료 현주(안지혜)를 만난 후 성장하는 과정을 담았다. 자영은 달리기를 통해 자존감을 회복하고 홀로 서는 방법을 발견한다. 달리기와 섹스 등 육체적인 요소가 강한 영화다. 그런데도 자영이 느끼는 애틋하면서도 무거운 감정이 영화 전체를 지배한다. 한 여성이 변해가는 과정을 면밀히 드러냈다는 평가와 함께 이준익 감독의 영화 ‘박열(2017)’에서 열연을 펼친 배우 최희서의 연기도 호평을 받았다.
한 감독은 "힘들었던 나의 20대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라는 질문을 던지는 영화"라고 했다. 한 감독은 최근 ‘SF8’이라는 명칭의 드라마-영화 크로스오버 프로젝트에도 참여했다. SF8은 웨이브(SK텔레콤과 지상파 3사의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를 통해 사전 공개된 후 현재 MBC에서 방영되고 있다.
지난해 한국 영화계의 화제작으로 367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각색한 김효민 작가는 영화 연출부 출신으로 감독을 꿈꾸다 작가로 전향한 인물이다. 이 영화는 주인공 지영(정유미)의 남편 대현(공유)을 원작 소설보다 훨씬 자상한 인물로 표현했다. 민감한 주제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부부의 현실을 잘 보여준 영화로 각색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김 작가는 "지영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가 아닌 한국의 가부장제 시스템의 문제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원작을 적극적으로 톤다운했다"라고 했다.
영화판에서 잔뼈가 굵은 심 대표는 1963년생, 한 감독과 김 작가는 각각 1985년, 1984년생이다. 이들은 맡은 일과 나이는 모두 다르지만 "여성 영화인이 설 자리가 아직은 남성보다는 부족하지만, 꾸준히 여성의 이야기를 이어 나가겠다"라고 입을 모았다.
여성 영화인으로서 본 한국 영화계의 현 상황은.
심재명 "대학을 졸업하고 1987년 가을에 서울극장에 입사하면서 영화계에 발을 디뎠다. 영화 일을 꿈꾸는 인력들이 대거 충무로로 몰렸던 시절임에도 여성 영화인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은 극히 소수였다. 40여 년이 지난 현재, 현직까지, 100여 명의 여성 감독이 활약하고 있으며 이는 여성 영화인의 위상 변화를 증명한다. 그런데도 최근 10여 년간 영화 산업 내 여성 감독의 비중은 5~10%에 불과하다. 제작자의 경우는 15~20% 정도다. 고무적인 것은 최근 2~3년간 여성주의적 시각을 견지한, 또는 여성 감독의 영화들이 독립영화계를 중심으로 많이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와 성취도 놀랍다. 세계적으로 여성주의에 관한 관심이 커짐은 물론, 창작자와 관객의 니즈(수요)가 서로 맞물리면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본다."
한가람 "확실히 독립영화계는 여성 연출자가 많아지는 추세다. 그러나 상업 영화계는 아직도 남성 연출자의 비중이 훨씬 높다. 특히 촬영이나 조명 등 기술 파트에는 여성 스태프가 매우 적다. 이런 분야에서도 많은 여성 영화인들이 활동할 수 있어야 한다."
김효민 "여성 작가로서 필드에서 느끼기로는 딱히 유리천장이 있다거나 벽이 높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다만, 아직도 투자자들 사이에서는 '여자가 감독 하면 영화가 성공하기 어렵다'는 우려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간의 문제일 뿐, 점차 개선될 것으로 기대한다."
여성 영화인은 홍보, 의상, 분장 등에 몰려 있다는 시각도 있다. 특히 여성 배우는 중년으로 갈수록 설 자리가 없지 않나.
한가람 "여성 배우들은 남성 배우들보다 맡을 수 있는 역할이 적다. 이는 여성 주인공이 주도적으로 이끄는 서사 자체가 드문 탓이다. 이에 따라 중년 여성 배우들은 자리가 더 적다. 지난해 참여한 캐나다 토론토 국제 영화제에서 내 영화에 대해 여성 스태프가 많아 놀랍다는 얘기를 듣기도 했는데, 정작 영화를 만들 때는 스태프의 성비를 의식하지 못했다. 감독과 프로듀서, 조감독, 주연 배우들이 모두 여성이라는 점이 인상적이었던 것 같다. 남성 영화인보다 여성 영화인의 활동 비중이 낮은 것이 유독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게 됐다."
여성 영화인으로서 제작 전반 및 현장에서 겪는 애로사항은.
한가람 "아직 신인이기 때문에 경험해보지 못한 측면이 많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영화 아카데미를 졸업할 무렵 연출가의 성이 어떤 영화를 만들 것인가에 영향을 미치더라. 실제 장르적인 면에서는 로맨틱 코미디나 멜로 영화 연출을 많이 권유받기도 했다."
김효민 "작가 분야에서는 여성 비중이 높은 편이다. 특히 영화보다 드라마 분야에서 여성 작가의 활약이 돋보인다. 다만, 창작자로서 더욱 다양한 캐릭터를 그리기 위한 파격적인 여성 캐릭터 구성과 진지한 여성 서사에 대한 영화 업계 안팎의 벽은 여전히 상당히 높다고 느낀다. 제대로 된 여성의 이야기를 하기는 아직 좋은 환경이 아니라는 뜻이다."
성적으로 평등한 영화는 상업 영화보다 독립영화에 많은데.
한가람 "여성 캐릭터가 이끄는 영화는 관객이 덜 좋아할 것이라는 편견이 너무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고 본다. 이는 여성 배우가 남성 배우보다 소위 티켓 파워가 약하다는 의미인데, 그게 과연 캐릭터의 성별에 따라 좌우되는 문제인지 아니면 애초에 여성 배우에게 주어지는 기회가 너무 적은 탓은 아닌지 반드시 돌아봐야 한다. 여성 서사를 다룬 상업 영화 시나리오가 더 활발하게 창작될 기회가 주어져야 관객의 선택 폭도 넓어진다."
김효민 "영화는 시대상을 반영한다. 거대 자본이 오가는 상업 영화는 자연스럽게 만들어지게 돼 있다. 성 평등 영화가 더 많아지기 위해서는 여성 캐릭터에 대한 다양하고 깊은 성찰이 먼저 필요 하고, 동시에 그에 맞는 인프라 변화도 이뤄져야 한다."
영화계에는 여성 주연 영화는 흥행하기 어렵다는 일종의 불문율이 있다고 들었다. 그러나 2019년 한국 영화 흥행 순위 10위 안에 82년생 김지영이 들어가 있기도 한데.
한가람 "사실이다. 82년생 김지영은 여성 인물이 주인공인 영화들과도 다른 미덕이 있다. 보편적으로 여성들이 겪는 문제를 전면적으로 다룬 이야기이고 원작부터 그런 측면에서 주목을 받았기 때문에 여성 관객들의 지지를 받았다고 생각한다. 아직은 불문율을 깰 수 있다는 인식까지는 갈 길이 먼 것 같지만, 이런 불문율이 문제라는 인식이 생긴 것부터가 큰 변화다."
김효민 "82년생 김지영의 인기는 새 시대 새로운 관객이 만들어 준 것이다. 사회가 변하는 만큼 관객의 요구도 달라지기 때문에 이런 불문율은 깨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여성 영화는 흥행 어렵다는 불문율 깨져야
한국판 여성 히어로에 대한 생각은.
심재명 "할리우드 여성 히어로물은 마블로 대표되는 시리즈물과 캐릭터물, 거대 물량을 쏟아부은 액션 대작들이 상대적으로 많다. 우리의 경우는 한국적 현실 상황과 영화적 상상력이 결합한 창작물에서 적극적으로 여성 히어로를 만들어내면 되지 않을까 싶다. 중요한 건 이런 영화가 탄생하려면 여성 영화인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 내려는 꾸준한 노력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점이다."
한가람 "여성 캐릭터들이 서로 연대해서 무언가를 이뤄나가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보통 할리우드 히어로물을 봐도 여러 명이 등장할 경우 남성이 대다수고 소수의 여성 히어로들이 끼어있는데, 여성 캐릭터들이 서로 힘을 합쳐 더 강한 무엇인가를 상대하는 이야기가 흥미로울 것 같다."
향후 활동 계획 및 여성 영화 발전을 위한 제언은.
심재명 "남성 중심적인 한국 영화계에서 여성 제작자로서의 정체성과 책임감을 항상 생각하며 살았다. 한편으로는 여성이 주인공인 이야기에 본능적으로 더 끌리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명필름 창립 작품부터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코르셋·1996)를 제작했다. 이전 영화들의 성과에 연연하지 않고 더 발전하고 계속 성장하는 여성 영화인으로 활동하고 싶다. 특히 최근 등장한 윤가은, 전고운, 한가람, 김도영, 이옥섭, 윤단비, 임선애 등 여성 감독들의 작품을 보면서 조심스럽게, 그러나 한국 영화의 미래에 희망을 갖게 됐다. 젊은 신예 여성 감독들의 지속적인 활약과 건투를 응원하고 적극적으로 교류하겠다."
한가람 "한국 영화계에서 캐릭터의 성별이 남성으로 치우치게 되는 건 여성에 대한 인식이 문제일 수도 있지만, 다양한 소재와 플롯(구성)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가 나오지 못하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기존에 흥행했던 영화의 법칙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인 것도 같다. 관객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더 예민하게 느껴야 한다. 특히 최근 젊은 관객들은 OTT(인터넷 TV 서비스)를 통해 정말 다양한 콘텐츠를 접하고 있다. 상업 영화에서도 더 다양한 시도가 있어야만 여성 영화도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김효민 "기존의 남성성에 끼워 맞춰진 여성 캐릭터가 아닌 더욱 현실적인 여성의 이야기를 좀 더 진지하게 할 수 있는 캐릭터를 만들고 싶다. 최근 장시간 관찰한 여성 캐릭터가 등장하는 시나리오를 쓰고 있기도 하다. 서퍼가 서핑을 즐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파도를 잘 알고 조율할 줄 알아야 한다. 일정 기간 관찰과 경험이 쌓여야 진짜 서핑의 맛을 느낄 수 있다. 서퍼처럼 여성 영화인들도 사회라는 파도를 잘 이해하고 올라타 균형감 있게 조율할 수 있기를 바란다. 앞으로 작품을 통해 시대 변화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한다."
◇plus point
"모든 여성은 슈퍼히어로"…아카데미 시상식 뒤흔든 할리우드 여전사들
올해 2월 한국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4관왕 수상으로 큰 화제를 모은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현장에서는 할리우드 ‘여전사’들의 활약도 눈부셨다.
과거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배우들이 화려한 드레스와 값비싼 장신구로 주목을 받은 것과는 결이 다른 모습이 연출된 것.
할리우드 영화계에서 강력한 여성 히어로의 원조 격으로 꼽히는 ‘에이리언’의 배우 시고니 위버는 ‘캡틴마블’을 연기했던 브리 라슨과 ‘원더우먼’의 갤 가돗과 나란히 무대에 올라 아카데미 시상식 92년 역사상 처음으로 시상식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아일랜드의 여성 지휘자 겸 작곡가 에이미너 눈을 소개했다.
그는 아카데미 음악상 후보로 노미네이트 된 ‘조커’와 ‘체르노빌’ 등 5개 영화의 음악을 지휘했다. 결국 음악상 수상의 영광은 ‘조커’에 돌아갔다.
위버는 이 자리에서 "아카데미 역사상 최초로 여성 지휘자가 오케스트라를 이끌게 됐다"라며 "모든 여성은 슈퍼히어로"라고 외쳤다.
그는 이어 "모든 여성, 소녀들, 어머니들, 딸들에게 이야기하고 싶다"라며 "꼭 목소리를 내시기 바란다. 우리는 여러분의 목소리를 들어야만 한다"라고 했다.
[-더 많은 기사는 이코노미조선에서 볼 수 있습니다.]
[여성 히어로의 시대] ①여성 히어로가 몰려온다
[여성 히어로의 시대] ② 니키 카로 ‘뮬란’ 감독
[여성 히어로의 시대] ③ 디즈니 최초 여성 애니메이션 시나리오 작가 린다 울버튼
[여성 히어로의 시대] ④21세기 디즈니 전성기 이끈 밥 아이거의 철학
[여성 히어로의 시대] ⑤여성 히어로 영화 변천사
[여성 히어로의 시대] ⑥
[여성 히어로의 시대] ⑦ DC와 마블 여성 히어로 원더우먼·캡틴마블 진화상
[여성 히어로의 시대] ⑧ 대표 여성 히어로 훑어보기
[여성 히어로의 시대] ⑨ 여성 영화인들이 말하는 한국 영화계
[여성 히어로의 시대] ⑨ 박상현 ‘결백’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