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장칼럼] 기울어진 당정관계가 초래한 재정폭주

조선비즈
  • 정원석 정책팀장
    입력 2020.09.17 04:00

    문득 10년 전 사진이 한 장 떠올랐다. 장년의 신사 두 사람이 손을 맞잡고 악수를 했지만, 각자 시선은 정반대를 향하고 있었다. 2010년 12월 13일에 일어난 이 어색한 장면의 주인공은 윤증현 당시 기획재정부 장관과 안상수 한나라당 대표였다.

    우여곡절 끝에 날치기로 통과된 2011년 예산안에서 한나라당이 불교계 민원을 해결하기 위해 요구한 템플스테이 예산 800억원이 누락되자, 집권여당 대표가 기재부 장관을 부른 것이다. 이날 회동에서 윤 전 장관은 여당 측 시정 요구의 부당함을 조목조목 따졌고, 이에 격분한 안 전 대표의 고성이 문밖으로 새어 나왔다고 한다. "우리가 무슨 바보냐, 기재부만 똑똑하냐. 기재부만 (나라살림을) 걱정하느냐"라는 이야기가 나왔다고 한다.

    10년이 지난 2020년 기획재정부는 4차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했다. 한 해 4차례 추경 예산을 편성한 것은 1961년 이후 59년 만이다. 당시는 5·16 군사정변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체제였다. 선거를 통해 집권한 민간 정부 체제에서 4차례 추경을 편성한 것은 전례가 없던 일이다. 경제부처 장관을 역임했던 한 전직 관료는 "세입(稅入)이라는 개념이 없던 당시에는 미국 원조를 받으면 바로바로 정부 예산에 반영하느라 추경이 잦을 수 밖에 없었다"면서 "경제성장으로 세입, 세출 개념이 정립된 상황에서 추경을 한 해 4차례나 한다는 것은 비정상적인 재정운용"이라고 말했다.

    윤증현(왼쪽) 전 기획재정부 장관이 2010년 12월 13일 여의도 한나라당사를 방문해 안상수 전 한나라당 대표와 악수하는 모습. 당시 안 전 대표는 윤 전 장관에게 예산안 처리 과정에서 일부 예산이 누락된 것 등에 대한 설명과 정부 대책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고성까지 질렀고, 윤 장관도 이에 반론을 폈던 것으로 전해졌다. /조선DB.
    10년 전 기재부는 집권 여당 대표의 호통에 정면으로 맞섰지만, 지금 기재부는 그렇지 않다. 올해 4차례 추경에서 단 한 번도 주도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헌법 상 국회에 제출된 정부 예산을 증액하기 위해서는 기재부 장관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1차 재난지원금 지급 대상을 소득 하위 70%에서 전(全)국민으로 확대하는 2차 추경 논의에서 홍남기 경제부총리의 반대의견은 중요하지 않았다. 홍 부총리는 집권 여당의 추경 예산 증액 요구에 비협조적이라는 이유로 당시 이해찬 대표로부터 해임 건의안 제출 협박을 받아야만 했다.

    초유의 4차 추경 편성 논의에서도 재정당국인 기재부의 의견은 주요 변수가 아니었다. 재정당국 수장인 홍 부총리가 "코로나 방역 단계가 3단계로 격상되면 4차 추경을 검토해보겠다"고 했지만, 큰 영향력은 없었다. 코로나 방역이 3단계로 올라가지 않았는데도 이낙연 민주당 대표와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합의하자, 4차 추경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기재부는 556조원 규모의 내년 예산안을 발표한 지 불과 일주일 만에 7조8000억원 규모의 4차 추경안을 뚝딱 만들었다. 그 와중에 기재부가 만든 예산 편성 초안에는 없던 9300억원 규모의 전국민 통신비 2만원 지원 예산이 급조됐다. 김태년 민주당 원내대표가 아이디어를 내고, 이낙연 대표가 청와대에 요구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한 해 추경을 4차례나 편성한다는 것은 주먹구구식 재정운용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어 보인다. 정부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라는 재난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하지만, 이미 코로나 정국이 반년 넘게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설득력이 떨어진다. 정부가 코로나 여파를 과소평가했다가 뒤늦게 추경 편성을 통한 임기응변 식의 대응에 나서고 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문제는 임기응변식 코로나 대응에서 재정 운용의 전문성을 갖고 있는 관료 집단의 의견이 철저히 무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경제부처 관료들 사이에서는 "기재부 예산실이 계산실로 전락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기재부 예산실이 집권 여당이 결정하는 사업에 돈을 집어넣는 ATM(자동현금인출기) 기계로 전락했다는 이야기다.

    더불어민주당은 180석이라는 의석수를 지렛대로 행정부를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고 있다. 국민들에게 걷은 세금으로 조성되는 정부 예산이 경제발전을 위한 전략적인 판단에서 배분되는것이 아니라, 집권 여당의 득표(得票) 논리에 휘둘리는 선거 전략으로 악용될 수 있는 환경이다. 정부 예산이 정치권의 선심성 예산으로 뒤덮이는 포크배럴(pork barrel·돼지고기 담는 통)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불편한 당정관계를 감수하겠다는 홍남기 경제부총리 등 정책당국자들의 용기가 필요하다.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