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입구역 앞에는 서울대가 없고, 신길온천역에는 온천이 없다.’

경기 안산시 신길동에 있는 지하철 4호선 신길온천역. 하지만 역명(驛名)과 달리 이곳엔 온천이 없다. 2000년 4호선 안산선이 연장 개통될 때 온천 개발이 추진될 것으로 보고 이같은 이름을 붙였지만, 안산시와 온천을 발견한 고(故) 정장출 박사의 유족간 분쟁이 길어지면서 아직까지 온천시설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경기 안산시 신길동에 있는 지하철 4호선 신길온천역.

갈등은 땅 소유자와 온천 개발 권한을 가진 측이 분리돼 있는데서 비롯됐다. 온천이 발견된 땅 소유자는 안산시인데, 온천을 개발할 우선권은 정 박사에게 주어진 것이다.

안산시는 2005년 정 박사가 세상을 떠나자, 온천 관련 권리도 함께 사라졌다고 주장하면서 신길온천역 앞에 아파트 등을 건설하는 방안을 추진해왔다. 이에 대해 정 박사의 유족은 온천을 발견하면서 생긴 권리가 당연히 상속된다고 반박했다.

그런데 최근 경기도행정심판위원회(행심위)가 정 박사 유족의 손을 들어주면서 온천을 개발할 수 있는 길이 다시 열렸다. 정 박사가 숨진 이후에도 온천 발견자로서 개발을 할 권리가 유족들에게 상속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 온천 발견 이후 35년… ‘소송의 역사’

신길동 온천을 둘러싼 갈등의 시작은 지난 198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질학자였던 정 박사는 땅 소유자와 계약을 맺고 굴착, 온천을 발견했다. 정 박사는 2년 뒤 관할 지자체인 안산시에 온천발견 신고를 냈다. 발견자로 공식 인정을 받을 경우 온천 개발 권한을 얻어 사업에 나설 수 있는 길이 열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안산시는 정 박사의 온천발견 신고 접수를 거부했다. 이후 정 박사는 안산시의 결정이 부당하다며 소송을 제기, 대법원까지 가 1992년에야 승소했다.

고(故) 정장출 박사가 지난 1985년 온천을 발견한 토지. 현재의 신길온천역 주변에 있다.

정 박사는 정식으로 온천발견 신고자가 됐지만, 1993년 그가 낸 ‘온천지구 지정’ 요구는 또다시 안산시에 의해 불가 통보를 받았다.

안산시가 정 박사에게 거듭 거부 처분한 것은 이 땅이 반월·시화 산업단지와 인접했기 때문이다. 산업단지를 개발하면서 배후 주택단지를 짓고자 한 것이다. 실제로 현재 바로 옆 안산 단원구 성곡동이나 시흥시 정왕동 등은 주택이 빼곡히 들어섰다.

안산시는 이 땅에 대한 등기를 1998년 마쳤다. 2000년부터 국민임대주택 예정 지구로 용도가 바뀌면서 온천 개발은 더욱 어려워졌다.

그런데 사업성 부족으로 당초 시가 의도했던 주택 개발은 흐지부지 됐고 정 박사도 행정 소송을 진행하던 2005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 결과적으로 30년 넘게 이 땅은 온천도 주택도 없는 공터로 남게 됐다.

유족들은 국민권익위에 판단을 구했다. 2016년 권익위는 안산시가 유족들에게 온천 발견 신고자 지위를 보장하고, 신길온천 개발 방안을 적극적으로 마련해야 한다고 의결했다. 하지만 권익위 결정은 권고적 효력일 뿐이어서 안산시가 따를 의무는 없었다.

◇ 행심위 "온천 관련 권리 유족이 승계"… 안산시 "향후 계획 검토중"

땅을 방치할 수 없었던 안산시는 지난 2월 ‘온천발견신고 수리의 실효 및 취소’를 공고했다. 정 박사가 세상을 떠나면서 온천 관련 권한도 사라졌다고 본 것이다. 이후 신길온천역의 이름을 능길역으로 바꿔달라고 국토교통부에 건의까지 했다.

신길온천역 출입문에 게시된 안내문.

유족은 반발했고, 행정심판에 나섰다. 그리고 행심위는 심리 끝에 지난달 19일 안산시의 실효 및 취소 공고는 ‘무효’라는 결론을 내리며 유족의 손을 들어줬다.

행심위는 "사망자에 대한 행정처분은 무효라는 대법원 판례에 따라 안산시의 처분도 무효라는 결론을 내렸다"며 "청구인(유족)에게 행정 처분의 효력이 인정될 여지도 없다"고 했다.

행심위는 또 "온천발견신고자로서 부여된 ‘온천이용허가 우선권’ 등의 혜택은 특정 신분에 기초하거나 특별한 능력을 요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일신전속권(그 주체만 행사할 수 있는 권리)적’ 권리가 아니고, 상속 대상에 해당한다"며 "온천발견신고자 지위의 승계를 허락하지 않는 특별한 지위가 없는 이상, 유족이 그 지위를 승계한다"고 설명했다.

행정심판법에 따르면 행정청은 행심위 재결에 불복할 수 없다. 행정 소송도 불가능하다. 유족은 결국 안산시가 온천수 추가 굴착 등 개발을 허용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반면 안산시는 아직 결론 난 것이 없다는 입장이다. 특히 정 박사가 온천을 발견했던 30년 전과 달리 온천법이 개정돼 1일 적정양수량 등 충족해야 할 기준이 더 생겼다는 이유에서다. 안산시 관계자는 "행심위 재결 내용을 토대로 앞으로 어떻게 할지 검토하고 있다"며 "아직 결론 난 것은 없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