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색은 통합당 당색
"긁어 부스럼 만드는 게 진보 정치인"
유시민의 '백바지 사건' 때와 대비
'민주당 더 이상 진보적이지 않다' 보여줘
"반발 계산한 정치적 퍼포먼스 가능성"

정의당 류호정 의원이 5일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국회 본회의에 참석했다가 친문(親文)지지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은 것에 대해 "이렇게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게 진보 정치인이 해야 할 일"이라고 했다. 류 의원은 이날 뉴시스와 통화에서 "국회의 권위가 영원히 양복으로 세워질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지난 4일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국회 본회의에 참석한 정의당 류호정 의원(왼쪽)과 2003년 ‘백바지’(하얀색 면바지)를 입고 국회에 등원했다 논란에 휩싸인 유시민 당시 국민개혁정당 의원(현 노무현재단 이사장)의 모습

류 의원은 "관행이나 TPO(시간·장소·상황)가 영원히 한결 같은 것은 아니다"라며 "일 할 수 있는 복장을 입고 (국회에) 들어왔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류 의원은 "(우리 사회가) 너무 천편일률적 복장을 강조하는데, 국회 내에서도 이런 관행을 바꾸자는 얘기가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복장이 아니더라도 50대 중년 남성으로 가득 찬 국회가 과연 시민들을 대변하고 있는가"라고 했다.

류 의원은 그동안 청바지에 흰색 셔츠, 반팔 티, 청남방 등 편안한 옷을 입어왔다. 현행 국회법에는 '국회의원으로서 품위 유지 규정'이라는 포괄적 조항만 존재할 뿐, 복장에 대한 규정은 따로 없다. 하지만 류 의원이 국회 본회의에 분홍색 도트 무늬 원피스를 입고 등원한 사진이 전날(4일) 오후와 이날 오전 여권 지지자들이 활동하는 페이스북 등 온라인 공간에서 빠르게 확산됐다.

이들은 류 의원의 사진을 공유하고 "소풍 왔느냐?", "때와 격식을 차려 입어라"라는 등 비판을 했다. 일부 여권 지지자들은 '술집도우미' '새X 마담' 등 성희롱성 발언도 했다. 이에 류 의원은 "원피스를 입어서 듣는 혐오 발언은 아니다"라며 "양복을 입었을 때도 그런 댓글이 있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 정치의 구태, 여성 청년에 쏟아지는 혐오 발언이 나타나 뭔가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지 않겠나"라고 했다.

류 의원은 전날 열린 청년 국회의원 연구단체 '2040청년다방' 포럼에도 이 옷을 입고 참석했다고 한다. 그는 이 옷을 입고 본회의에 가기로 참석자들과 약속했고, 이를 지켰다고 한다. 논란이 거세지자 정의당 조혜민 대변인은 이날 오후 논평을 내고 "류 의원을 향한 비난이 성차별적인 편견을 담고 있다"며 "유감을 표한다"고 했다. 조 대변인은 "중년 남성의 옷차림은 탈권위이고, 청년 여성의 옷차림은 정치적이지 못하다는 평가는 이중잣대"라며 "지금은 2020년"이라고 했다.

정의당 류호정 의원은 그동안 편안한 옷차림을 해 왔다. 지난 4일 국회연구단체 모임에 같은 원피스를 입고 참석한 모습(아래)

조 대변인이 말한 '중년 남성 옷차림'은 2003년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의 이른바 '백바지 사태'를 뜻한다. 유 이사장(당시 국민개혁정당 의원)은 하얀색 면바지를 입고 등원해 의원 선서를 하려 했으나 여야 의원들의 집단 항의를 받은 사건이다. 현 여권 지지자들은 이런 행동을 '탈권위의 상징'이라고 옹호했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는 이날 페이스북에서 유 이시장의 사례를 거론하며 "그때는 민주당 지지자들이 그 드레스코드를 옹호했다"며 "그런데 지금은 그들이 복장단속을 한다, 옛날 수꼴당 지지자들의 그 모습을 그대로 닮아가고 있다"고 했다.

친문 지지자들의 비판 수위가 높아지자 민주당 고민정 의원은 진화에 나섰다. 고 의원은 "류 의원의 모든 생각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입은 옷으로 과도한 비난을 받는 것에 대해선 동의할 수 없다"며 "국회는 다른 목소리, 다른 모습, 다른 생각들이 허용되는 곳이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정치권에선 류 의원의 이날 옷차림이 계산된 행동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정치인에게 옷은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도구다. 이날 류 의원은 분홍색 원피스에 노랑색 마스크를 썼다. 정치권 관계자는 "정의당의 당색은 노란색이고, 민주당의 당색은 파란색이다. 분홍색은 미래통합당의 당색이다"라며 "범 여권으로 분류되는 정의당 소속 의원이 붉은색 계열의 원피스를 입으면 민주당 지지층이 반발할 것이란 추론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했다.

이 관계자는 "류 의원이 '민주당도 더 이상 진보적이지 않다. 보수화 됐다'를 보여주는 정치적 퍼포먼스를 했다고 봐야 한다"고 했다. 지난 2012년 김재연 전 통합진보당 의원은 19대 국회 개원 첫날 검은 재킷에 무릎 위로 15㎝쯤 올라오는 보라색 미니스커트를 입어 눈길을 끌었다. 보라색은 통합진보당을 상징하는 색이고, 검은 재킷과 흰 블라우스는 이정희 전 대표와 김미희 의원 등 '경기동부연합' 중심의 구당권파 인사들이 자주 해왔던 차림새다. 이는 김 전 의원이 구 당권파를 계승한다는 뜻으로 읽혔다.

하지만 통합당과 정의당이 손을 맞잡을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통합당 하태경 의원은 지난달 성추행 혐의를 받은 박원순 전 시장 조문 불참을 두고 정의당과 의견을 같이 한 것을 계기로 '연대를 하자'고 했다. 이에 정의당은 대변인 논평으로 "적어도 관점이 비슷해야 연대가 가능하다"며 "관심없다"고 했다.

다만 류 의원의 분홍원피스를 계기로 정의당이 민주당 극성 친문 지지층과의 본격적인 단절에 나설 것이란 관측은 나온다. 이날 이정미 전 대표는 류 의원을 비난한 친문 커뮤니티를 겨냥해 "민주주의 개혁 이런 거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방이 맞느냐"라며 "정말 기분이 더럽다"라고 했다.

김재연 전 의원의 2012년 국회 첫 등원 모습과 2013년 덕성여대 앞 강연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