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칙적'에서 '제한적 허용'으로…‘탈규제’ 외치고 규제에 갇힌 대기업 CVC

입력 2020.07.31 15:21 | 수정 2020.07.31 20:06

기업형 벤처캐피탈(CVC) ‘제한적 보유’ 허용
차입한도 제한 등 각종 규제로 ‘반쪽짜리’ 논란
전문가들 "유연한 적용으로 벤처투자 활성화 취지 살려야"

대기업 지주회사의 기업형 벤처캐피탈(CVC) 보유 허용 방안을 결정한 지난 30일 비상경제 중앙대책본부 및 경제장관회의에서 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은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에게 문제제기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반지주회사의 CVC 소유를 원칙적으로 허용하겠다"는 홍남기 부총리의 회의 모두발언 내용이 이날 논의되는 정책 방향과 다르다는 이유에서였다.

박 장관의 문제제기는 "CVC를 원칙적으로 허용하겠다는 방향은 네거티브 규제 방식으로, 몇 가지 금지 조항을 제외하고 구체적인 회사 운영에 규제가 없도록 하겠다는 방향인데, 이날 결정한 CVC 허용안은 그렇지 않다"는 이유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전면적인 대기업 CVC 허용에 끝까지 부정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발표된 허용방안은 CVC 설립 시 차입한도(200%)를 엄격하게 제한하고, 펀드 조성시 외부자금조달 비중을 40%로 제한하고, 해외투자 자산 비중을 20%로 제한하는 등의 규제를 달아 '반쪽짜리 CVC’가 됐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왼쪽)과 박영선 중소기업벤처부 장관(오른쪽)이 지난 19일 오후 정부서울청사에서 비상경제회의 개최 결과를 브리핑하기 위해 브리핑룸으로 입장하고 있다. /연합뉴스
박 장관의 문제제기에 홍 부총리는 모두발언 내용을 수정할 것을 지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회의 결과를 전달하는 보도자료에서는 "일반 지주회사의 CVC를 원칙적으로 허용한다"는 모두발언 문구가 ‘제한적으로 허용’이라는 내용으로 수정됐다. 대기업 CVC 허용 방향이 한 순간에 ‘원칙적’에서 ‘제한적’으로 뒤바뀌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 외부자금 조달 40% 제한…현금부자 기업만 벤처투자 하라?

정부 안팎에서는 이같은 해프닝이 대기업 지주회사의 CVC 보유를 허용해놓고, 각가지 규제를 더덕더덕 붙여놓은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반응이 나온다. 금산분리 완화에 따른 총수 일가의 지배력 강화를 막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CVC를 통한 벤처투자 문턱이 높아졌다는 반응이다. 벤처투자 활성화라는 본래 목적 달성에는 소홀한 결과가 나왔다는 얘기다. 실제 지주회사 68곳 가운데 대기업 7곳이 설립을 검토해보겠다고 답하는 데 그쳤다.

CVC 형태는 기존의 ‘중소기업창업투자회사(창투사)'나 '신기술사업금융업자(신기사)' 두 가지 유형이 유지된다. 여기에 타인자본을 이용한 지배력 확장이나 사(私)금고화 등 총수일가 사익편취를 막기위한 각종 규제들이 더해지면서 기존 CVC에 ‘족쇄’만 매단 형식이 됐다.

특히 차입한도를 자기자본의 200%로 제한한 규제가 대표적인 족쇄로 지목된다. 이는 자기자본의 800%~1000%까지 차입한도를 두는 기존 창투자와 신기사에 비해 너무 제약이 강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펀드 조성시 외부 자금 유치 한도를 40%로 묶어둔 것도 발을 묶는다. 지주사의 경우 활용할 수 있는 현금이 적을 수밖에 없는데 계열사간 출자를 막은 것도 문제다.

당초 스타트업 업계에서도 외부자금 차입 가능성을 막는 것은 사업 활성화를 막을 수 있다고 우려한 바 있다. 자금 조달이 어려울수록 사업 규모도 덩달아 축소되기 때문이다. 벤처투자 활성화라는 제도의 본 취지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외부자금이 들어올 경우 투자 규모 전체가 증대되는 시너지효과뿐만 아니라 운용사인 GP(CVC설립 지주사)를 감시하는 시장의 순기능도 축소된다.

유정주 전국경제인연합회 기업제도팀장은 "자금조달 규모에 제한을 두면 결국 사업도 축소될 수밖에 없다. 계열사에 쌓아놓은 돈이 많은 기업이 뛰어들라는 얘긴데, 현재 삼성 이런 곳을 제외하고 투자규모를 확 늘리기 위해서는 외부자금이 같이 와야한다"며 "외부자금을 통한 시너지효과도 있고, 운영은 GP(운용사)인 CVC가 하지만 외부자금이 들어오면 어디서, 어떻게 투자했는지 LP(출자자)의 감시기능도 따라오는데 이런 부분을 활용하지 못할 수 있어 아쉽다"고 했다.

◇대기업 뛰어들 유인 클까? 68곳 지주회사 중 대기업 7곳 '검토'

공정위에 따르면 당국이 CVC 제한적 보유방안을 제시할 경우 CVC 설립을 검토할 것이냐는 조사에서 긍정적 응답을 보낸 지주회사는 68곳 중 18곳이었다. 이 가운데 대기업 집단이 7곳을 차지했다. 여러 차례 의원입법이 추진될 만큼 업계의 숙원으로 여겨졌던 것에 비하면 저조한 참여율이다.

시장에선 "규제장치가 달린 제한적 보유방안으로 지주체제 밖 CVC를 안으로 끌어들일 유인이 크지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미 지주회사 체제인 기업들은 체제 밖이나 해외법인을 보유하는 방식으로 CVC를 갖고 있어 굳이 지주체제 내 CVC로 전환해 제약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현재 지주사 체제인 롯데, CJ, 코오롱, IMM인베스트먼트 집단은 지주체제 밖 계열사 형태로 4개의 국내 CVC를 보유하고 있다. SK와 LG 등은 해외법인 형태로 CVC를 보유하고 있다. 한 대기업 임원은 "세제 혜택 등이 있기 때문에 전환을 시도하고 싶지만 지주사 내 CVC 설립, 펀드조성, 투자에 이르기까지 규제 조항이 너무 많아서 선뜻 실행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제도의 부작용을 줄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투자 활성화라는 본 목적이 실현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더 우선이라고 지적한다. 정부의 규제가 시장의 유동성 흡수와 신성장 동력 발굴이라는 본 취지를 오히려 훼손하고 있다는 것이다. 각종 나열식 규제로 반쪽자리 제도를 실행하기 보다 네거티브 규제 방식으로 빗장을 열어 CVC 활성화를 추진하되, 관리·감독 등 사후관리를 엄격하게 시행하는 방식이 제도의 활용성을 높일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중소기업진흥공단 이사장을 지낸 임채운 서강대 경영학부 교수는 "금산분리 완화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지만, 여러 제약이 있으면 CVC는 활성화되기 어렵다"며 "향후 제도 시행 이후 시장과 소통을 통해 점차 완화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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