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욱의 술기행](29) “유기농 통밀로 농부가 직접 빚은 진맥소주, 국내 유일"

조선비즈
  • 박순욱 선임기자
    입력 2020.06.26 10:04

    안동 맹개마을에서 3만평 밀농사 짓는 농업법인 밀과노닐다 박성호 대표
    통밀로 막걸리 만들어 상압증류, 그가 만든 밀소주에는 위스키-바닐라 향이 난다
    IT기업인에서 농부로, 다시 양조인으로 변신 성공 "농업의 꽃은 술"
    미스터션샤인에 등장했을 정도로 농장 풍경 아름다워...메밀꽃 가을음악회도 성황
    낙동강 상류와 청량산이 마을 감싸고 있어...마을 진입에는 트랙터 이용해야

    서울에서 쉬지 않고 3시간을 차로 달려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의 농암종택에 도착했다. 1504년 사간원에 근무하다가 연산군의 노염을 사 안동으로 유배된 농암 이현보 선생 종가댁이다. 농암종택을 지나면 곧바로 낙동강이 차 앞을 가로막는다. 상류라 강 폭이 그리 넓지는 않지만 다리가 없어 차로는 갈 수가 없다. ‘육지 속 섬’인 맹개마을로 가려면 바퀴 큰 트랙터에 옮겨 타야 한다. 전기가 들어온 지 아직 10년이 되지 않은 청정 오지 산골마을, 통밀로 만든 증류주 ‘안동 진맥소주’가 익어가고 있는 마을이다. 맹개마을은 ‘해가 잘 드는 외딴 강마을'이란 의미다.

    거센 낙동강 상류 물이 마을을 휘감고 있고, 퇴계 이황이 자주 찾았다는 청량산이 병풍처럼 둘러싼 경관이 일품이다. 종편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제작팀이 두번이나 찾아와 촬영허가를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져, 작년 한해에만 7000여명이 이곳에서 ‘농가스테이’를 체험했다. 세트장으로 꾸민 주막이 온전히 남아, 이곳 방문객들을 위한 도서관으로 활용 중이다.

    저녁무렵 나가본 들녘에는 수확기를 코앞에 둔 황금 빛깔의 밀알이 햇살을 받아 여물어가고 있었다. 가장 넓은 밀밭은 직선 거리만 500m라고 했다. 한쪽 끝에 서면 다른쪽 끝이 잘 보이지 않았다. 값싼 수입산에 밀려 생산이 급격히 줄고 있는 곡물 중 하나가 우리 밀이라고 들었다. 그러나, 이곳엔 우리 밀 중에서도 최고급으로 치는 ‘유기농 밀’이 지천으로 자라고 있었다. 농장 서너군데 흩어져 있는 밀밭 전체 크기는 3만평.

    안동 진맥소주 생산업체인 밀과노닐다(농업법인)의 박성호 대표는 3만평의 농장에서 직접 지은 밀로 증류주를 만든다. /박순욱 기자
    맹개마을 주소는 경북 안동시 도산면 가송길 162-129. 맹개마을 대부분의 땅은 밀밭이다. 겨울과 봄에 자란 밀을 수확하면, 같은 자리에 메밀을 심어 가을에는 3만평의 메밀밭이 장관이다.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매년 9월 10일 전후엔 농가음악회가 외지인을 맞는다.

    ‘안동 진맥소주’는 이곳 맹개마을의 3만평 농장에서 키운 유기농 통밀로 만든 증류주다. 작년 말에 출시된 신상 전통술이다. 진맥은 밀의 옛이름이다. 안동은 쌀소주의 본고장이다. 쌀과 누룩으로 막걸리를 만들어, 증류한 술이 안동소주다. 하지만, 진맥소주는 쌀이 아닌 밀로 만든다. 밀은 보리와 함께 맥주, 위스키의 주재료다. 진맥소주는 밀과 누룩으로 발효주인 막걸리를 먼저 만든 뒤, 상압증류한다.

    진맥소주 원료는 위스키와 같지만, 위스키는 맥주를 증류한 술인데 비해, 진맥소주는 한국식 누룩으로 막걸리를 만든 후 증류시켰다. 재료(밀)는 서양 술 위스키와 같고, 제조 방법(막걸리를 만들어 증류)은 전통 쌀소주와 같은 술이 진맥소주다. 진맥소주에는 그래서 위스키 향이 묻어있다. "싱글몰트 위스키 향이 난다"는 사람들도 있다. 40도, 53도 제품은 높은 도수에도 불구하고, 바닐라, 레몬 향이 난다. 재료인 밀에서 우러나는 꽃, 과일향들이다.

    ‘안동 진맥소주’를 만드는 농업법인 ‘밀과노닐다’ 박성호 대표는 14년째 맹개마을에서 밀농사를 짓고 있다. 독일 유학(컴퓨터 전공) 후 1997년 귀국해 IT기업을 10년 남짓 경영하다가, 2007년 이곳으로 귀농했다. ‘IT전도사’에서 ‘농부’로 변신한 그가 최근 ‘양조인'으로 다시 거듭난 이유가 궁금했다. 진맥소주는 유기농 밀로 만든 국내 유일의 증류주다. 특히나 직접 키운 농산물로 술을 만든 사례는 국내 양조장에서 보기 드물다.

    맹개마을에서 1박하면서 낮에는 밀밭, 소주 숙성고, 음악회 공연장인 돔하우스 등을 둘러봤다. 맹개마을이 한눈에 보이는 700여m 높이의 학소대에도 올라, 밀밭농장을 사진 한컷에 담기도 했다. 밤에는 진맥소주를 맛봤다. 양조장 체험을 제대로 했다.

    하지만 양조장은 이곳 맹개마을에서 차로 15분 거리, 안동시내 나가는 길목에 따로 자리하고 있다. 안동댐이 근처에 있고 낙동강 상수원하고도 가까워 맹개마을 안에서는 양조장 설립이 허가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술 제조 후에 맹개마을 토굴에서 숙성을 하도록 식약청의 허가를 받았다.

    학소대에 오르면 안동 진맥소주를 만드는 맹개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수확을 앞둔 밀밭과 돔 하우스도 보인다. /박순욱 기자
    IT사업을 접고 귀농한 이유는?

    "재미있던 기술개발이 회사의 성장과 경쟁이란 틀에서 성공과 실패를 반복하다보니 심신이 지쳤다. 귀농했던 2007년, 아이들은 아직 학교에 다니지 않았을 정도로 어렸다. 지속가능한 가족의 삶, 생태적인 생활, 온라인 세계가 아닌 손으로 하는 현실적인 일을 찾아 귀농했다. 처음 5년은 전기도, 물도 없이 고생했지만, 이제는 한해에 만명 남짓 찾아오는 명소가 된 것에 대해 보람을 느낀다."

    밀로 소주를 만든 이유는?

    "14년 전 안동으로 귀농하면서 3만평 규모 밀농사를 짓고 있다. 친환경 공법으로 유기농 밀 인증까지 받았지만, 빵집에 밀가루 팔아서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다. 오래 전부터 ‘술이 농업의 꽃’이라고 생각했다. 농업의 부가가치를 높이기 위해 술을 만들었고, 전세계 술시장 관점에서 볼 때 밀도 쌀 이상으로 훌륭한 술 원료가 될 것으로 생각했다. 술을 만드는 과정에서 우연하게 옛문헌에 밀소주 기록을 찾게 돼 더 확신을 갖게 됐다. 1540년에 쓰여진 요리책 ‘수운잡방'에 밀소주 ‘진맥소주’에 대한 주방문(레시피)이 자세히 나와 있다."

    밀로 만든 막걸리, 약주는 만들지 않고 곧바로 증류식 소주만 만든 이유는?

    "발효주는 발효주의 특징이 있고, 소주는 또 소주의 특징이 있다. 소주를 선택한데는 두가지 이유가 있다. 안동은 소주로 유명한 지역이다. 소주로 승부를 볼 수 있다는 생각은 지역적 특성에서 비롯했다. 또 하나는 내가 있는 곳이 외진 곳이라는 한계다. 막걸리, 약주 같은 발효주는 유통기한이 1~2개월 정도인데, 이곳이 유통에는 불리한 지역이기 때문에, 산속 오지에서 장기 숙성할 수 있는 증류주를 선택했다. 소주는 장기보관이 유리하고, 서양 위스키처럼 장기숙성해서 고품질의 증류주를 생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안동소주의 고급화 전략이다. 기존 안동소주의 품격을 한층 높이는 프리미엄 소주를 만드는 것이 목표다."

    맹개마을 밀밭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다. 안동 진맥소주는 통밀을 쪄서 발효주를 만든 뒤 증류한다. /박순욱 기자
    진맥소주 레시피가 실린 문헌을 소개해달라.

    "밀소주의 레시피가 처음 소개된 문헌은 1540년경에 김유가 저술한 요리책인 ‘수운잡방’이다. 안동 지방의 121가지 음식의 조리법을 담고 있는데, 소주 중에는 유일하게 밀소주 제조법만 언급돼 있다. ‘밀(10되)을 쪄서 누룩(5되)과 함께 찧어서 물(1동이)을 부어 발효시켜 5일 후 증류해서 만든 술이 진맥소주'라고 돼 있다. 진맥은 밀의 옛말이다. 술이름도 여기서 가져왔다. 책이 쓰여진 시기로 보면 한참 이전인 고려시대, 몽골이 침입했을 당시 병참기지가 안동에 있었다고 한다. 그때 몽골의 증류주 기술이 전해지지 않았나 생각한다.

    밀 소주에 대한 옛기록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 밀소주 빚기를 시작했는데, 우연히 접한 수운잡방에서 밀소주 내력을 처음 본 것이다. 내가 눈으로 확인한 최초의 안동소주 원료가 쌀이 아닌 밀이었다는 사실에 전율을 느꼈다.

    수운잡방보다 120년 뒤인 1670년경 장계향이 쓴 한글조리서 ‘음식미디방'에도 쌀소주, 찹쌀소주, 밀소주 3종이 소개돼 있다. 이 두가지 문헌만으로 결론짓기는 어렵지만 밀소주 역사가 쌀소주에 앞섰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수운잡방에는 쌀소주에 대한 언급이 없고, 100년도 더 지난 음식디미방에는 같이 언급됐기 때문이다."

    밀소주가 쌀소주보다 앞선다?

    "그렇게는 단정적으로는 얘기할 수 없다. 한 두 권의 고문서로 모든 사실을 알 수는 없지만, 수백년간 한반도에서 흔적없이 사라졌던 밀소주가 안동지역의 오래된 문헌에서 발견된 것은 소주 기술이 전달된 경로와 연관이 있고 밀이 귀하던 시절, 우리에게 밀보다 흔했던 곡물인 쌀과 찹쌀로 소주를 만드는 유연성이 생기지 않았을까 하는 개인적인 가설 수준이다.

    술은, 늘 주변에서 구하기 쉬운 재료로 그 지역에서 토착화된다는 것이 개인적 생각이다. 특히 술에서 쌀이나 찹쌀에 대한 선호도나 편견은 유독 우리나라가 더 강하다는 생각이다. 쌀이나 찹쌀로 발효주를 만드는 곳은 쌀을 주식으로 하는 아시아의 많은 나라에서 발견되지만 증류주를 기준으로 보면 베트남과 한국, 일본 정도이다. 중국은 수수를 중심으로 밀과 보리, 쌀 등이 블렌딩되고, 유럽은 보리, 밀 등이, 미국은 옥수수가 주요한 곡물 증류주의 주원료이다."

    밀과노닐다 대표인 박성호-김선영 부부가 토굴에서 숙성 중인 술독을 들어보이고 있다. 진맥소주 22도는 6개월, 40도와 53도는 1년 이상 숙성시킨다. 숙성이 오랠수록 술맛이 깊어지면서 부드러워진다. /박순욱 기자
    술 원료로서 밀의 적합성은?

    "술을 만드는 원료가 달라지면 술은 맛과 향이 달라진다. 밀과 쌀 증류주의 차이는 재료가 주는 맛과 그 질감 등에 있다. 여름 곡물인 쌀과 달리, 겨울을 나는 밀(10월말에 씨를 뿌려 이듬해 6월말에 수확)은 따뜻한 본성이 있다. 그래서 술을 만들면 몸이 따뜻해지는 특성이 있다. 진맥소주는 통밀로 술을 빚기 때문에 밀이 갖고 있는 다양한 곡물 향이 은은하게 배어 있다."

    직접 키운 농산물로 술을 만든 사례가 드문데?

    "농부가 양조인 역할까지 하다 보니, 진맥소주는 만드는데 최소 2년이 걸린다. 10월에 파종하고, 이듬해 6월에 수확, 가을에 술을 담근다. 증류를 하고도 숙성을 1년 이상(22도 제품은 6개월 숙성) 거친다. 그래서 우리의 모토는 ‘씨앗부터 술병까지(Farm to Glass)’다. 진맥소주 한병에는 2년의 기다림, 5제곱미터의 밀밭, 그리고 농부의 한 말 땀방울이 담겨 있다.

    농부가 만드는 술의 장점도 크다. 오랫동안 직접 밀을 키우다 보니 수확기 밀알 향만 맡아봐도 어떤 성격의 술이 만들어질지 대번 짐작이 간다. 양조용 밀, 빵을 만드는 밀, 누룩을 만드는 밀을 따로 심을 정도로 ‘밀 박사'가 됐다. 원료를 사다가 술을 빚는 양조인은 짐작도 할 수 없는 노하우다."

    밀밭 농장이 있는 맹개마을을 소개해달라.

    "태백에서 낙동강이 발원해서 강물이 이곳 청량산을 지나서 남쪽으로 흘러간다. 그 과정에서 제일 북쪽에 위치해 있는 곳이 여기 맹개마을이다. 안동의 제일 북쪽에 위치해 있다. 옛부터 산세가 험하고 낙동강 상류라서 물살이 세서, 굽이치는 지형이 많이 만들어졌다.


    낙동강 상류로 가로막혀 있는 맹개마을로 들어가려면 트랙터에 옮겨타야 한다. /밀과노닐다 제공
    그래서 한반도 지형같기도 하고, 동그란 섬 같기도 한 맹개마을이 오랜 시간을 거쳐 형성된 것이다. 이곳이 청량산과 도산서원 사이에 있어서 퇴계 선생이 청량산을 가기 위해 자주 이곳을 지나갔다는 기록이 있다. 퇴계 선생이 우리 마을을 내려다보면서 ‘내가 그림 속으로 들어간다'는 시를 남기기도 했다. 퇴계 선생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곳이다. 10여년전에는 맹개마을 앞쪽에 농암종택이 옮겨왔다. 안동댐 건설로 수몰지역에 있던 농암 이현보 선생의 유적들이 흩어져 있다가 한데 모인 것이다."

    먹거리, 휴양, 치유 같은 농촌의 복합 기능에 관심이 많다고 들었다.

    "10여년동안 농사를 지으면서 자연스레 농촌의 복합적 기능에 관심이 생겼다. 한때 6차 산업이라고도 했는데, 농촌이 단순히 농사만 짓는 곳이 아니라, 농촌이 갖고 있는 다양한 가치들, 예를 들면, 휴식, 먹거리, 휴가, 치유, 체험 등의 기능에 점차 관심을 가졌다.

    농촌이 휴양의 공간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 처음엔 경관이 예쁘다고 찾아오는 분들이 늘어나면서 농가민박, 팜스테이를 해보면 어떨까? 하는 관점에서 동네분들의 도움을 받아서 체험휴양마을 개념으로 2015년에 소목화당을 지었다. 안동시로부터 체험휴양마을로 지정을 받아 운영을 해왔다. 밀, 메밀로 빵 만들기 체험, 밀밭에서 밀서리를 한다든지 등의 체험 프로그램을 병행했다. 5년이 돼서 자리를 잡게 됐다.

    교통은 불편(맹개마을로 들어오려면 강을 건너야 하기 때문에 일반 승용차는 안되고, 트랙터에 옮겨타야 한다)하지만 온전한 휴식을 할 수 있다는 관점에서 좋아들 하신다. 지난해 기준으로 견학, 체험, 숙박, 교육 등을 위해 7000여명 이상이 되었고 매년 증가하고 있다. 올해도 4월말까지 코로나로 인해 주춤하지만 청정지역이란 이미지로 인해 소규모 방문은 끊이지 않고 있다.

    맹개마을은 메밀꽃이 한창인 매년 9월 음악회를 연다. 사진은 작년에 연 ‘가을에 취하다 음악회’. 마을 풍경과 메밀꽃에 취하고, 공연에 취하고 주최측이 내놓은 술에 취한 멋진 가을 밤이었다. /밀과노닐다 제공
    가을엔 음악회도 연다고 들었다.

    "밀을 수확한 밭엔 메밀을 심는다. 그 메일이 흐드러지게 피는 때에 음악회를 열고 있다. 직접 비닐로 만든 돔 하우스에서 매년, 메밀꽃 필 무렵에 음악회를 열고 있다. 안동시에서 운영하는 큰 공연장 공연은 농민들에게는 다소 소외돼 있는게 사실이다. 그래서, 지역 농민들끼리 작은 음악회를 해보면 어떨까 생각했다가 그러지 말고, 외부에 개방을 해서, 그것도 메밀 꽃이 가장 잘 피었을 때 공연을 하면, ‘농촌이 이렇게 예쁜 곳이구나' 홍보도 자연스럽게 되지 않을까 했다. 유명 가수는 아니지만, 나름 실력 있는 인디 가수, 성악가들을 초빙했다. 9월초, 가을이 시작되는 즈음에 연다. 의외로 폭발적인 반응으로 유료 티켓이 금방 다 팔렸다. 수용 관객이 70~100명 정도인데, 2016년 첫해 공연부터 150명이 왔다. 음악회 이름은 ‘메밀꽃 필 무렵'으로 잡았는데, 작년에는 공연 이름을 ‘가을에 취하다'고 정했다. 가을 풍경에 취하고, 음악공연에 취하고, 그리고 우리가 내놓는 술에도 취하는 공연으로 만들었다."

    드라마 ‘미스터션샤인’ 세트장인 주막에서 맹개마을 방문객들이 음식과 술을 나누고 있다. 현재 이곳은 도서관으로 꾸미고 있다. /밀과노닐다 제공
    드라마 미스터션샤인에 등장하게 된 계기는?

    "주변의 경관으로 인해 소소하게 영화나 드라마 촬영장소로 섭외 문의가 오곤 한다. 메밀꽃 한창 피어 맹개마을이 연중 가장 손님이 많던 어느해 9월에, ‘도깨비’라는 이상한(?) 드라마를 찍겠다며 메밀 꽃다발과 메밀 꽃밭이 필요하단 연락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귀신이 나올 법한' 드라마 제목부터가 이상하고 또, 바쁘다는 이유로 시덥잖게 거절을 했다. 그런데, 해가 바뀌고 나니 세상은 온통 메밀꽃의 도깨비 얘기로 가득 차 버렸고 나는 아내를 비롯한 직원들로부터 ‘한심한 사람’이 되어 버린 적이 있었다. 그러던 차에, 같은 감독과 작가에 의해 드라마 관련 장소섭외가 또 들어왔는데, 그게 미스터선샤인이었다. 이번에는 적극적으로 안동의 이곳 저곳을 소개했고 덕분에 맹개마을은 아름다운 풍경으로 묘사된 자그마한 주막과 강 풍경을 덤으로 얻을 수 있었다. 미스터선샤인 세트장으로 만든 주막은 그 모습을 그대로 갖고 있어, 이곳을 찾은 사람들이 잠시 쉴 수 있는 작은 도서관으로 활용할 참이다."

    맹개마을을 찾는 방문객들을 위한 숙박시설인 소목화당. 뒤에 보이는 절벽 위가 학소대다. 학이 새끼를 낳고 둥지를 틀었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밀과노닐다 제공
    국내 양조장 중 술 원료를 직접 재배하는 경우가 드문데.

    ‘씨앗을 심는 것부터, 술을 병에 담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직접 한다(Farm to Glass)’라는 모토로 임하고 있다. 직접 농사 지은 것을 술 원료로 사용한다는 원칙을 갖고 있었다. 가양주처럼 소량으로 농사를 지어 술을 담그는 사례들은 있었지만, 술 원료 전체를 외부에서 전혀 조달하지 않고 술을 담그는 사례는 드문 것으로 안다.

    하지만 술 원료 생산과 술 제조를 겸하는 사례가 외국에서는 흔하다. 외국의 와이너리(포도원)나 위스키 공장들은 단순히 제조장으로서의 기능을 넘어 원료를 직접 재배, 관리하고 있다.

    ‘농업의 꽃이 술’이라고 오래전부터 생각해왔고, 직접 농사짓고 가공해서 술을 만드는 방식이 앞으로는 국내에서도 확산되리라 보고 있다. 자기만의 술 향기와 맛을 내기 위해서는 그 원료를 직접 재배, 가공해야 한다. 좋은 품질의 재료를 직접 만들면 그 재료로 만든 술의 향과 맛을 제어할 수 있다고 본다.

    앞으로 술 소비량이 늘어나 원료 생산량이 모자라는 상황이 오더라도 외부에서 원료를 조달할 생각은 없다. 원료를 생산하고, 또 그 원료로 술을 만든다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원료를 외부에서 조달하는 대부분의 양조장들에게는 없는 특별한 가치를 갖고 있다는 자부심이 적지 않다.

    10년 이상 밀 농사를 짓다 보니 수확기의 밀 향만 맡아봐도 품질을 대번에 알 수 있다. 이 밀로 술을 만들면 어떤 향을 낼지 짐작이 간다. 이런 것은 농부가 아니면 가능하지 않다. 실제로 우리는 양조용 밀, 누룩을 만들기 위한 밀, 제빵용 밀 종류를 구분해서 재배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밀 품종별 품질의 차이에 대해 조금 더 잘 알기 때문이다."

    진맥소주는 22도, 40도, 53도 세가지가 있지만, 간판 상품은 40도 제품이다. 원액 그대로 40도 제품을 마시면 통밀빵의 고소함, 레몬같은 과일의 단맛이 느껴진다. 53도 제품에는 바닐라향, 약간 매운 맛도 풍긴다. 얼음을 타서 53도를 천천히 마시면 다양한 곡물향이 되살아난다. 박성호 대표는 "술이 약한 분들을 위해 만든 22도 제품은 시원한 여름오이 같은 향이 난다"고 말했다. 작년 말에 출시됐지만, 전통술 매니아들 사이에선 이미 진맥소주는 ‘핫한 술’로 등극했다. 전통주 전문점에도 인기다. 현대백화점에도 들어가 있다.

    진맥소주 원료인 통밀. 겉껍질만 제거한 통밀을 쪄서 밀누룩과 섞어 막걸리를 만든 뒤 증류한다. /밀과노닐다 제공
    진맥소주 제조과정을 간략하게 소개해달라.

    "크게 나누면 농사짓는 과정과 술 만드는 과정, 두가지다. 밀은 한국은 물론 전세계적으로 겨울 오기 직전에 파종한다. 추위가 시작되는 10월말, 11월초에 씨앗을 뿌리면, 2주 후에 파랗게 싹이 올라오다가 겨울을 맞이한다. 얼어죽은 듯이 있지만 뿌리는 살아서 겨울을 보낸다. 3월초부터 크기 시작해 6월말에 다 여물어서 수확한다. 수확한 밀은 바로 건조를 해서 2도의 저온창고에서 보관된다. 7~8월 혹서기는 술을 담그지 않는다. 9~10월쯤 술을 만드는 시점에서 선별작업을 거친다.

    이제는 양조 단계다. 껍질만 벗긴 통밀을 쪄서, 밀누룩을 섞어 밑술을 담그고 2차례 덧술을 더해(삼양주) 한달 동안 발효과정을 거치면 발효술(막걸리)이 완성된다. 이 발효한 술을 거르고 두단계의 증류를 거쳐 진맥소주 증류원액이 완성된다. 옹기에 6개월~1년 숙성을 하고 관능과 품질검사, 규격을 맞추어 병입해 출고한다.

    씨앗을 뿌린 밀이 여물어 술 원료로 사용돼, 발효와 증류, 숙성을 거쳐 소비자에게 진맥소주가 전달되는데 최소 2년이 걸린다. 대단한 슬로푸드가 아닐 수 없다. 직접 농사를 짓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장기 숙성을 거친 후 세상에 내보내다 보니, 그만큼 시간이 많이 걸릴 수밖에 없다.

    굉장히 더디다 보니, 자금 회전에 대한 고민이 있다. 이제 2년이 처음 지나 제품이 앞으로는 매년 나오게 돼 그나마 다행이다."

    독일 유학 후 IT창업 활동은?

    "1992년~96년말까지 독일 베를린자유대학에서 컴퓨터를 전공했다. 초기 개념의 인터넷을 주로 공부했다. 97년에 창업한 것이 예스컴이었다. 문화와 인터넷을 접목시키는 일을 주로 했다. 정부 사업으로 공연 온라인 예약티켓 전산망 구축사업도 했다. 1997년에 서울에서 국제연극제가 열렸는데, 그 준비작업의 일환으로 예약전산망을 공연장과 연결하는 사업을 주도했다."

    안동은 쌀소주의 본고장인데?

    "지역인 안동을 내세우면서도 밀로 만든 소주를 만들었으니, ‘돌연변이’라는 지적은 피할 수 없게 됐다. ‘밀소주가 마실만 하겠어?’ 이런 선입견을 극복하는 게 큰 과제다. 술의 매력은 다양성에 있다고 오래 전부터 생각했다. 획일화된 쌀소주 위주에서 새로 밀소주가 더해져 장기적으로는 안동소주의 외연이 넓어지는 시기가 빨리 왔으면 한다. 술 재료가 달라지면, 술의 향과 맛이 당연히 달라진다. 지금은 ‘개성 있는 소비’를 추구하는 시대가 아닌가?"

    진맥소주 40와 그 원료인 밀. 14년째 밀농사를 짓고 있는 박성호 대표는 수확 시기의 밀 향기만 맡아도 어떤 성격의 술이 만들어질지 짐작이 간다고 한다. /박순욱 기자
    가격이 기존 안동소주의 두배다.

    "신생 양조장 입장에서 가격 결정은 쉽지 않았다. ‘후발 주자가 가격은 왜 더 비싸?’ 이런 반응은 예상하고 있다. 하지만, 유기농 친환경 인증을 받은 밀을 직접 생산해, 그 중에서도 좋은 재료만 농부가 엄선해, 빚은 밀소주의 가치를 인정받고 싶었다."

    향후 사업계획은?

    "경북도 지원을 받아 돔 하우스 옆에 치유센터를 짓고 있다. 농촌이 갖고 있는 기능 중 최고는 치유라고 본다. 이곳에 와서, 쉬면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건강을 되찾아가게끔 치유센터를 전문가 도움을 받아 운영할 계획이다.

    우리나라는 아직 초창기이지만, 오랫동안 유학을 했던 독일의 경우, 의료보험으로 농장에 가서, 며칠씩 쉬어가는 바우처를 발급하는 식으로 농촌의 치유기능을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해오고 있다. 병원에서만 요양을 하는게 아니라. 전문화된 시설과 인력을 갖춘 농촌에서도 얼마든지 요양을 하는 시대가 곧 올 것으로 본다.

    진맥소주의 출발은 맹개마을이다. 맹개마을은 플랫폼이란 생각을 처음부터 했었다. 그 플랫폼엔 사람이 오갈 때 의미가 있고, 인간의 희로애락이 함께 곁들여 있다. 지친 현대인들을 위한 치유농장인 동시에 ‘Farm to Glass’의 꿈을 실현하는 마을로 자리 매김하고 싶다. 토굴에서 익어가는 술 만큼이나 세월이 지나면서 더 부드럽고 향기로운 맹개마을 프리미엄 술 플랫폼을 만드는 것이 향후 5년간의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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