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운명 쥔 37세 경제수장…긴축 비판론자
과감한 부채 유예·탕감 제안…"체질 만들 시간 달라"
정부-채권단 이견 크지만 "협상 가능성 있다" 분석도
"아르헨티나는 기꺼이 빚을 갚을 의사가 있다. 하지만 능력이 없다." (5월 3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 기고에서 마르틴 구스만 아르헨티나 경제부 장관)
아르헨티나의 30대 경제수장은 조국을 구한 영웅이 될까, 실패한 비주류 경제학자로 남을까.
아홉번째 디폴트(채무 불이행)를 앞둔 아르헨티나의 부채 협상을 이끄는 30대 경제부 장관 ‘마르틴 구스만’이 시험대에 올랐다.
구스만은 채권단에 과감한 부채 탕감안(案)을 제안해 독단적이며 현실을 모른다는 비난을 받고 있지만, 국민들 사이에선 아르헨티나를 구할 마지막 희망으로 떠오르고 있다.
22일(현지시각) 로이터에 따르면 아르헨티나 정부와 채권단은 650억달러(80조5000억원) 규모의 외화 채권 구조조정을 위한 협상 시한을 오는 6월 2일까지로 연장하기로 했다. 원래 기한은 오늘이었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사실상 ‘선택적 디폴트’에 들어갈 것이라고 현지매체 라 나시옹(La Nación)은 전했다. 선택적 디폴트란 채권 가운데 일부를 갚지 못한 경우로 채무자가 ‘빚을 전부 못 갚겠다’고 드러눕는 디폴트 보다는 다소 나은 셈이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이날 만기인 5억300만달러(6200억원) 규모의 외채 이자를 갚지 않았다. 5억300만달러의 이자가 아르헨티나가 진 부채의 일부에 불과한데다 정부가 채권단과 협상 중이기 때문에 ‘선택적 디폴트’라고 표현한 것이다.
만약 정부가 6월 2일까지 채권단과 협상에 이르지 못하면 디폴트를 선언할 수도 있다. 이 경우 채권단이 미 법원에 채무 반환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아르헨티나 역사상 최악의 디폴트로 불리는 2001년에 바로 그런 일이 벌어졌다. 소송전이 무려 15년 간 이어지는 동안 아르헨티나는 국제 금융시장에서 국채를 발행할 수 없었고 만성질환이 된 경제 불황의 시작이 됐다.
◇ "이자 3년 간 못내" 부채감축案 제안한 구스만은… 행정 경험 없는 긴축 반대론자
아르헨티나 정부는 계속된 경제 불황으로 오는 2030년까지 갚아야 하는 외화 부채가 3230억달러(400조355억원)에 이른다. 채권단도 국제통화기금(IMF) 같은 국제기관부터 블랙록 등 자산운용사에 이르기까지 여러 집단으로 나뉘어져 있어 협상도 쉽지 않다.
이중 미국 법에 의해 달러화로 발행된 외채 650억달러에 대해 아르헨티나 정부는 ▲이자 지급 3년 유예 ▲이자 62% 감면 ▲원금 5.4% 탕감을 골자로 한 채무 구조조정 안을 지난달 채권단에게 제안했지만 거절 당했다. 이후 채권단 3개가 저마다 각각 다른 협상안을 제시한 상태다.
경제부 장관인 구스만은 협상 과정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이자 지급 3년 유예'라는 파격적인 안(案)을 내놓은 뒤 국내 언론과 외신에 거의 매일 같이 인터뷰, 기고를 하며 '빚을 갚기 전에 일단 경제 체질부터 만들게 해달라'는 일관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구스만은 작년 12월 정권 교체에 성공한 좌파 대통령 알베르토 페르난데스가 발탁한 인물이다. 1982년생으로 올해 37세다. 아르헨티나 라 플라타 국립대를 졸업한 후 거의 미국에서 연구 활동을 했다. 컬럼비아대에서 연구조교를 지내며 공공부채, 글로벌 거시경제, 금융 정책에 관한 논문을 썼다.
그가 화제가 된 건 젊기 때문만은 아니다. 행정 경험이 전무한데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조지프 스티글리츠의 애제자 라는 점에서 현지 매체는 ‘아르헨티나의 운명을 30대 스티글리츠가 쥐게 됐다’고 전했다.
스티글리츠는 불평등 연구로 2001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 했다. 그는 채권단 주도의 긴축 정책이 나라 경제를 망친다고 주장해왔다. 국가가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 때까지 기다려줘야 한다는 이론은 현재 구스만이 채권단에 하고 있는 주장과 일맥상통 한다.
구스만의 지도교수였던 스티글리츠는 함께 논문을 발표하는 등 연구 활동을 함께 했을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그와 친분이 두텁다. 구스만이 임명된 뒤 기고 전문매체인 ‘프로젝트 신디케이트’에 "아르헨티나가 구스만을 선택한 건 매우 잘한 일"이라는 글을 썼다.
지난 5일에는 토마 피케티, 2006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에드먼드 펠프스 등 세계 20개국 경제학자 138명과 함께 아르헨티나 정부를 지지하고 채권단을 압박하는 공동 명의의 입장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 "협상 타결 가능성 있다"…임기 5개월 페르난데스 정권 생사 갈림길
현재로서 구스만의 전략이 성공해, 아르헨티나가 디폴트를 면하게 될 지 여부는 알수 없다. 행정부 경험이 전무한 학자 출신 구스만이 비주류 경제학 이론에 입각해 무리한 협상안을 밀어 붙인다는 비판도 나온다.
일각에선 '협상 타결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채권단은 이자 지급 유예기간을 1년으로 줄이고, 채권 회수 비율을 높여야 한다고 제안했다. 자산운용사 블랙록이 포함된 채권단의 한 관계자는 FT에 "정부와 채권단의 제안은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다"며 "그 안에 합의점이 있다"고 말했다. 정부 사정에 밝은 한 관계자도 "협상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했다.
아르헨티나의 디폴트 여부는 임기 5개월 차인 페르난데스 대통령의 명운을 가를 중대한 고비다. 포퓰리즘으로 유명한 키르치네르 정권에서 지난 2003~2008년 역대 최장수 총리로 재임한 그는 우파 정권의 긴축정책을 비난하며 대통령에 당선됐다. 국민들을 오랜기간 괴롭혀온 부채 문제를 해결 한다면 지지율이 탄력을 받고 장기 집권으로 가는 길을 닦을 수 있다.
반대로 실패한다면 페르난데스 정권은 벼랑 끝에 몰린다. 해외 투자자들 사이에서 ‘부채에 중독된 나라’,‘남미의 병자’, ‘포퓰리즘의 실패사례’ 라는 오명을 얻은 아르헨티나의 대외신인도는 바닥으로 떨어진다. 또 한번 소송전으로 국채 발행이 어려워질 수도 있다. 대내적으로도 코로나 이전부터 50%에 달하는 물가상승률과 두자릿수 실업률, 불안정한 화폐가치에 신음하던 국민들이 2001년 디폴트 때 처럼 폭동을 일으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