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장칼럼] 미국식도 스웨덴식도 아닌, 새로운 기업지배구조를 모색할 때

입력 2020.05.21 06:00

지난 7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4세 경영 포기’ 선언은 한국 기업사의 새로운 장(章)을 열게 되었다. 단기적으로는 이 부회장의 결정에 대해 ‘뉴 삼성’을 여는 용단이라고 보는 쪽과, 재판을 앞두고 큰 실효성 없는 원론적 선언이라고 보는 쪽의 시선이 엇갈린다. 하지만 한국의 기업지배구조의 ‘유형 설정자(pattern setter)’ 역할을 해왔던 삼성그룹이 소유-경영 분리 방침을 천명한 것은 중장기적으로 한국 기업 전반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삼성의 가족 경영 포기 선언이 힘을 받는 이유는 다른 대기업집단도 후계 승계가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가장 큰 이유는 고도성장 시대의 종언이다. 고도성장기에는 신사업에 진출해 담당 계열사를 키우면서, 동시에 후계자가 해당 계열사 지분을 갖게 하면서 성장과 승계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었다. IT(정보기술)서비스나 물류 등 사익편취 대상이라 지적받는 계열사들도 따지고 보면 다른 계열사의 성장과 사업고도화 덕분에 덩치를 키울 수 있었다. 가족 경영의 정당성(legitimacy)을 갖기도 어려워졌다. 이른바 ‘오너 경영’은 안정적 소유구조와 단기 지표에 연연하지 않는 의사 결정이라는 장점이 있었는데, 저성장기에 그 같은 ‘과감한 투자’의 실익이 낮아지기 때문이다. ‘될 만한’ 계열사를 맡겨 경영 능력을 입증하는 과정도 힘들어졌다.

법·제도 측면도 마찬가지다. 그나마 남아있는 제도적 장치는 지주회사 체제 정비 과정에서 지분율을 높이는 것인데, 현 대주주들이 이미 써먹었다. 자본시장에서 가격이 싸게 매겨지는 신형 우선주를 증여하거나(아모레퍼시픽) 아니면 주가가 낮을 때 자사주를 매입하는 식(현대자동차)의 방법밖에 남아있지 않다.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면서 이른바 ‘오너’ 일가가 높은 지분율을 가진 대기업집단도 후계 승계가 안개 속인 것은 마찬가지다. 5대 그룹 중 SK와 롯데의 경우 후계 승계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게 재계 일각의 관측이다. 3~4세간 공동경영을 영위하는 회사들의 경우 지분이 잘게 나뉘어지면서 계열사를 나눠서 경영하는 일종의 할거(割據)형 지배구조가 이어진다. 권한과 책임이 일치하지 않다 보니 두산처럼 주도권을 쥔 한 명이 무리하게 계열사를 지원하다 그룹 전체를 위기에 몰아넣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 또 자녀 세대로 갈수록 계속 낮아지는 지분율도 문제다.

정부의 지주사 전환 촉진 정책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느냐도 큰 리스크다. 주력 계열사의 인적분할과 뒤이은 주식교환, 현물출자 규정을 이용해 대주주 일가 지분을 끌어올리는 방식은 노무현 정부 당시 만들어진 상법 규정 때문에 가능했다. 그런데 공정거래위원회가 지난 2018년 대기업집단의 관행을 공개 경고하고 나서는 등 현재 규정을 계속 두지 않겠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 일종의 ‘제도화된 꼼수’에 가까운 데다 지주사 전환이 어려운 주요 대기업집단과의 형평성도 논란 거리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다른 나라의 기업지배구조를 그대로 이식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기업지배구조 전문가들은 영국이나 미국식의 주주자본주의가 되기 위해서는 잘 발달된 대규모 자본시장이 있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금융자본이 오너 경영자를 압도하는 힘을 갖고, 경우에 따라 적대적 인수합병(M&A)이나 행동주의 투자자들에 의한 징벌적 행동이 가능해야 하기 때문이다. 영미식 자본주의 바깥, 특히 유럽 각국에서 ‘주주 자본주의’가 약한 것은 결국 자본시장의 규모 문제라 할 수 있다.

스웨덴이나 독일식의 기업지배구조도 문제가 있기는 마찬가지다. 보통 삼성의 지배구조 개편 모델로 스웨덴 발렌베리그룹이 언급되곤 한다. 그런데 스웨덴 사회민주당이 발렌베리 등 산업자본의 금융자본 지배와 은행을 지배하고 있는 15개 가문과 발렌베리 등 스웨덴 재벌 간의 유착관계를 용인해왔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다들 눈을 감는다. 또 배당 등에 중과세하면서 기업의 사내 유보를 유도하고, 은행이 대기업집단에 유리하게 자금을 공급하면서 대기업 독주가 심화되었다는 것도 언급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스웨덴은 대규모 자본이 투입되는 수출지향형 장치산업만 과도하게 성장하고 신산업에서 새로운 기업집단이 나타나지 않는 경제가 됐다.

지난해 ‘포천2000’에 등재된 스웨덴 기업 26곳 가운데 M&A나 분사 등을 제외하고 순수하게 1990년 이후 세워진 곳은 세 곳 밖에 없다. 그 가운데 순수하게 스웨덴인이 세운 제조업체는 1992년 세워진 정밀측정장비 회사 헥사곤 한 곳이다. 세계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전인 2000년 당시에는 스웨덴 50대 기업 가운데 1970년 이후 세워진 기업이 단 한 곳도 없었다.

독일의 기업지배구조도 그림자가 짙다. 캐롤 폴린 미국 에모리대 교수에 따르면 노동자의 감독이사회(이사회의 상위 기구) 참여 등 독일의 기업지배구조의 틀은 국가사회주의노동자당(나치) 집권기인 1930년대에 형성된 것이 2차 세계대전 이후까지 이어진 것이다. 국가 권력이 아주 강하게 커지지 않으면 이식되기 어렵다는 것을 시사하는 셈이다.

결국 다른 나라의 성공적인 사례를 그대로 이식하는 방식으로는 기업 지배구조를 바꿀 수 없다. 2000년대 장하성 당시 고려대 교수(현 주중대사) 등이 주도했던 주주 자본주의 운동이 별반 성과를 내지 못하고 소멸한 이유이기도 하다. 무리한 이식 시도는 성과가 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기형적인 제도 운영 행태 등을 낳을 뿐이다. 그보다 그 동안 경제 발전과 기업 성장의 경험을 발판삼아 주주와 이해관계자들의 목소리가 합리적으로 반영되고 경영진에 대한 상벌(賞罰)이 온당하게 집행되는 방식을 고민하는 게 낫지 않을까. 앞으로 몇 년간 진행될 기업지배구조 논쟁의 구도를 머릿속에 그리다 드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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