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경영권 물려주지 않겠다" 선언에 ‘오너경영 vs 전문경영인’ 재조명

조선비즈
  • 이재은 기자
    입력 2020.05.17 09:00

    선진국도 갑론을박… "韓·日은 오너경영이 수익성·성장률 더 뛰어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자녀에게 경영권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전격 선언하면서 재계가 충격에 빠진 가운데, 오너 경영과 전문경영인 체제의 장단점과 성과에 대해 갑론을박이 펼쳐지고 있다.

    "삼성이 전문성을 보유한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한 첫발을 뗐다"면서 전문경영인 체제 도입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부터 "오너 경영만의 강점을 활용하지 못하면 삼성이 장기적으로 경쟁력을 잃을 수 있다"는 부정적인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소유와 경영의 분리는 세계적인 추세이지만, 한국와 일본에서는 오너 경영이 더 높은 성장률과 재무성과를 보장해왔기 때문에 섣부른 도입은 시기상조라는 의견도 나온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5월 6일 오후 서울 삼성전자 서초사옥에서 대국민 사과를 발표하면서 "아이들에게 경영권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말했다. / 연합뉴스
    ◇선진국도 ‘가족기업’ 주목…전문경영 기업보다 장기 성장률·수익성 더 높아

    최근 선진국에서는 창업주 일가가 최대주주인 가족기업의 성장률과 재무성과를 주목하고 있다. 글로벌 투자은행 크레디트스위스는 창업주 일가가 회사 지분이나 의결권을 약 20% 이상 소유한 기업을 가족기업으로 정의하고 있다. 월마트, 이케아, 삼성그룹, 폴스크바겐, 알파벳(구글 모회사), 로레알, 하이네켄, LVMH(루이비통 모회사) 등이 가족기업에 포함된다.

    크레디트스위스가 2006년부터 2017년까지 전 세계 가족기업 1000곳의 경영 성과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가족기업의 영업이익이 비(非)가족기업보다 매해 높았다. 이런 현상은 전 업종에서 고르게 나타났다.

    크레디트스위스
    크레디트스위스 분석에 따르면, 창업주 일가는 장기적인 안목으로 성장 전략을 세우고 투자를 단행해 상대적으로 좋은 경영 성과를 냈다. 단기 성과를 중시하는 전문경영인과 달리 소유주가 주인의식을 갖고 최소 10~30년을 내다보는 투자를 단행하기 때문에 지속 성장이 가능했다는 설명이다. 크레디트스위스는 "가족기업은 분기 실적에 연연하지 않고 성장을 추구할 수 있어 장기적으로 수익성이 더 뛰어나다"며 "특히 미국과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의 가족기업은 매출 대비 연구·개발(R&D) 비중이 무척 높다"고 분석했다.

    ◇韓·日은 오너경영이 더 성과 좋아…미국처럼 CEO 장기집권 어려워

    특히 한국과 일본 등 아시아 기업의 경우 오너 경영 기업이 대주주가 없는 전문경영인 기업보다 실적이 좋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이경묵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는 "한국과 일본은 전문경영인이 혁신과 변화를 주도하기 어려운 환경"이라며 "제너럴 일렉트릭(GE) 같은 글로벌 기업은 전문경영인이 10~20년씩 장기 집권하면서 회사를 키울 수 있지만 한국과 일본은 이를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분위기와 법적 제도가 마련돼 있지 않다"고 말했다.

    실제 지난 수십년간 한국 산업이 비약적 성장을 한 배경에는 대기업의 오너 경영이 큰 역할을 차지했다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오너 경영은 강력한 리더십 아래 신속한 의사결정과 실행을 가능하게 했고, 국내 대기업은 이를 발판삼아 짧은 시간 내 기술을 습득해 제품을 생산하고 해외 시장에 진출할 수 있었다.

    오너 경영의 위력은 삼성의 ‘반도체 신화’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1990년대 초반 반도체 불황이 닥쳤을 때 전문경영인 중심의 일본 반도체 기업들은 투자를 축소한 반면, 삼성그룹은 이건희 회장 주도로 대대적인 투자를 단행했다. 눈앞의 위기보다 성장 가능성을 내다본 투자는 삼성 반도체가 일본을 앞지르는 계기가 됐다는 게 업계의 설명이다.

    2010년 5월 17일 메모리반도체 16라인 기공식 당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왼쪽에서 두번째). 이 회장은 사장단 회의를 주재하고 5대 신성장 사업에 10년 동안 23조원을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 삼성전자 제공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도 2008년 12월 금융위기 당시 경쟁사들이 구조조정에 돌입할 때 ‘10년 무고장 품질’을 내세운 품질경영을 통해 위기를 돌파했다. 전기차 배터리(2차전지)가 LG그룹의 미래 먹거리가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1991년부터 연구개발을 지시한 고 구본무 LG그룹 회장의 뚝심 경영 역시 오너 체제가 아니었다면 어려웠을 것이란 의견이 지배적이다.

    반면 1997년 외환위기 당시 부실기업으로 전락한 구 기아자동차와 2016년 부실회계 사태로 무너진 대우조선해양은 전문경영인의 대리인 문제를 보여주는 대표 사례다.

    재계 한 관계자는 "변화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전문경영인을 내세워 경영 전문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취지에는 동의하지만, 전문경영인이 위기 상황에서 총대를 메고 과감한 투자 결정을 내리긴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전문경영인 체제 도입하려면 CEO 감독 기능 갖춰야"

    한국의 경제성장과 궤를 같이한 대기업 오너 경영은 총수 일가가 자녀에게 기업을 물려주는 과정에서 탈세, 편법을 저질렀다는 비판을 받으면서 난관에 부딪혔다. 사회 안팎으로 세습경영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형성되면서 소유와 경영을 분리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졌다.

    삼성은 이번 ‘4세 경영 포기’ 선언을 계기로 주요 계열사 경영을 전문경영인에게 일임하고 총수는 이사회를 통해 우수 인재 영입, 투자 등에 관여하는 지배구조를 구축할 것으로 보인다. GE처럼 대주주가 없는 전문경영인 기업이 아니라 BMW처럼 최대주주가 전문경영인에게 경영을 맡기고 이사회를 통해 견제하는 방식이다.

    가족기업은 기업의 실질적 소유주가 직접 경영에 참여하는 오너 경영(소유직접경영)과 전문경영인을 영입한 뒤 감독하는 형태(소유간접경영)로 나뉜다. 삼성, 현대자동차, 도요타 등이 오너 경영의 대표적인 사례이고 월마트, 이케아 등이 후자에 해당한다. 월마트는 창업주인 월튼가가 지분 약 50%를 보유하고 있지만 이사회를 통해 경영진 견제만 하고 있고, 이케아 오너 일가는 장기전략 수립 과정에만 관여하고 있다.

    그래픽=송윤혜
    전문가들은 삼성그룹이 20~30년 뒤 전문경영인 체제를 도입하더라도 오너 경영의 장점을 살릴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조명현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되 오너 일가가 이사회나 공익재단을 통해 전문경영인을 감독하고 견제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며 "또 5년 후로 연동되는 스톡옵션 등 전문경영인이 장기 수익성을 목표로 회사를 경영하도록 유도하는 보상체계를 도입해 전문경영인 기업에서 나타나는 단기 경영의 폐해를 방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경묵 교수는 "오너 일가가 그룹 계열사 CEO를 선별할 수 있는 인사권을 행사하고, CEO를 감시·감독할 수 있는 체제를 마련한다면 오너경영과 전문경영인 체제 양쪽의 강점을 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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