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수 칼럼] 심퍼시의 시대에서 엠퍼시의 시대로

입력 2020.05.13 07:00 | 수정 2020.05.13 12:03

김지수 문화전문기자
수컷 펭귄 두 마리가 사랑에 빠지는 동화 ‘사랑해 너무 사랑해'는 뉴욕 센트럴파크 동물원에서 있었던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다른 암수 펭귄들이 알을 품어 낳은 아기를 키우는 것을 본 두 수컷 펭귄은 둥근 돌을 주워다 품기 시작하고, 이를 눈여겨본 사육사가 버려진 알을 둥지에 넣어주었다. 두 마리는 교대로 정성껏 알을 품어 마침내 아빠가 된다.

이 그림책이 영국 보육업계의 바이블이라고 알려준 이는 영국에 사는 일본계 논픽션 작가 브래디 미카코다. 미카코는 그의 책 ‘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은 블루'에서 두 펭귄의 사랑 이야기에 흠뻑 빠졌던 빈곤 지역 어린이집 아이들의 리얼한 대화를 들려준다.

"내가 알에 있을 때도 엄마랑 아빠가 품었을까?"
"아냐, 사람은 알에서 태어나지 않아."
"우리 집에도 아빠가 둘이면 좋을 텐데."
"아빠가 둘이면 왜 좋아?’
"아빠가 둘이면 셋이서 축구할 수 있잖아."
"엄마가 둘인 게 더 좋아. 엄마가 축구를 더 잘해."
"우리 집은 엄마밖에 없는데. 하지만 가끔씩 엄마 남자친구가 와."
"우리는 아빠 하나에 엄마 둘. 같이 사는 엄마와 주말에 만나는 엄마."

다양한 가정에 사는 다양한 인종의 아이들. 그 부끄럼 없이 투명한 머릿속엔 ‘정상 가족'과 ‘비정상 가족'의 구분이 없다. 다른 게 당연하니 좋고 나쁜 게 있을 리 없다.

초등학교, 중학교에 올라가면 사정이 달라진다. 십대들의 공동체는 약육강식의 법칙 아래, 계급과 인종과 성에 관한 어른들의 편견의 대리 전쟁터가 된다.

이전 책 ‘아이들의 계급투쟁'에서 보수당 정권의 긴축 복지로 빈곤에 내몰린 탁아소 아이들의 풍경을 기록했던 작가 브래디 미카코는(조지 오웰과 영화 감독 켄 로치의 피를 반반씩 물려받았다!), 최근에 한발 더 나아갔다. 영국의 밑바닥 중학교에 진학한 그녀의 십대 아들의 학교 생활을 관찰해 ‘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은 블루'라는 논픽션 에세이를 냈다. 미카코의 아들인 동양계 모범생 남자아이는 차별과 혐오와 폭력이 여러 층위로 뒤엉킨 백인 노동자계급 학교에서 몸으로 부딪치며 ‘다름'의 해결법을 익혀나간다.

고백하자면 나는 이 소년에게 크게 한 수 배웠다. 가난하지만 자존심 강한 친구 팀과 인종차별로 왕따가 된 또 한 명의 친구 다니엘 사이에서(심지어 두 친구는 서로를 경멸한다), 12살 아이가 균형을 잡고 차이를 좁혀 나가는 모습은, 경이롭다.

낡고 작아진 교복을 입은 친구 팀에게 엄마가 수선 봉사로 완성한 교복을 쓱 건네주는 장면에선 눈시울이 붉어졌다.
"우리 사이즈라 챙겨둔 건데... 필요하면 가져갈래?"
"왜 나한테 주는 건데?"
"친구니까. 너는 내 친구니까."
두 소년은 하이파이브를 하고, 팀은 공영단지 언덕길을 올라가며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팀도 엄마처럼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네." 엄마 앞에서 친구의 ‘가오'까지 생각해주는 십대라니!

‘정글의 원숭이' ‘쭉 찢어진 눈' 등 흑인과 아시아인을 향한 혐오 발언으로 학교 공식 ‘왕따’가 된 동유럽 이민자 다니엘을 대하는 태도는 더 흥미롭다.

"흑인 아이나 언덕 위 공영단지 아이들은 다니엘을 괴롭히는 데 끼지 않았어. 괴롭히는 건 전부 관계없는 아이들이야. 그게 제일 기분 나빠."
"‘피시(Political Correctness)하지 않은 말'을 하는 건 잘못이지만,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이유로 괴롭히는 것도 문제인 것 같아." 그리고는 불가사의한 표정으로 덧붙인다. "엄마, 나는 인간이 타인을 괴롭히길 좋아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벌주는 걸 좋아하는 거야."

소년의 전두엽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토록 심오한 지각 변동에 나는 할말을 잃었다. 결석도 안 하고 버티는 ‘왕따’ 친구 때문에 학교를 빠질 수 없다는 아이("내가 쉬면 다니엘이 외톨이가 되잖아"), 개성 강한 친구를 사귀는 게 쉬운 일은 아니라며 ‘우정의 값'을 치르는 아이 옆에서 그 부모도 쿨하긴 마찬가지다. ‘그런 기세라면 개근상을 받겠군!'

갈피마다 차별과 편견이 눈송이처럼 흩날리다가 지면에 닿는 순간 사르르 녹아내리는 마법 같은 풍경이라니!

‘나는 옐로에 화이트 약간은 블루'에서 12살 소년은 엠퍼시에 대해 이렇게 답한다. “스스로 남의 신발을 신어보는 것."
그 마법의 열쇠는 심퍼시(sympathy)가 아니라 엠퍼시(empathy)였다. 엠퍼시가 뭐냐는 질문에 십대 소년은 머뭇거리지 않고 단숨에 답한다. "스스로 남의 신발을 신어보는 것."

연민의 심퍼시 시대를 살았던 나에게, 더 조심하고 더 배려해서 결과적으로 더 쿨해지는 요즘 아이들의 엠퍼시 DNA는 경이롭다. 심퍼시가 자연스러운 감정이라면 엠퍼시는 고도의 지적 각성 능력이다. 타인의 감정이나 처지를 상상해보고 그 입장이 되어보려고 노력하는 것.

론 나의 선의에 앞서 상대의 자유의지를 ‘최대값'으로 묻는 자제력. 증오 대신 ‘합리적 불일치’를 최소값으로 두는 우아하게 균형잡힌 태도.

엠퍼시야말로 이 시대의 가장 생산적인 정신 자원이다. 다행히 어른보다 더 나은 아이들이 저마다 ‘존중의 무게 추'를 들고, 1/n로 이뤄진 다양성의 세상을 향해 쭉쭉 나아가고 있다. 심퍼시의 시대에서 엠퍼시의 시대로.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