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자발적’이라고 하지만 기업인 체감은 ‘압박’
"기업에 기부는 준(準)조세라는 말도 있지만, 해도 너무하는 것 아닌가 싶다. 실적이 악화되면 법인세도 줄어드는데 ‘기부금’은 어려울수록 오르는 것 같다."
정부가 코로나 사태에 따른 긴급재난지원금을 전 국민에게 지급하는 과정에서 기부 활성화 방안을 함께 검토하면서 기업들이 부담감을 호소하고 있다. 대통령과 고위 공직자들이 잇따라 기부에 나서는 상황에서 수조원의 매출을 내는 대기업이 가만있을 수 있겠느냐는 게 기업인들의 목소리다.
지금까지 청와대나 정부, 여당이 명시적으로 기업에 이번 재난지원금과 관련해 기부를 종용하거나 강제한 적은 없다. 정부는 오히려 "기부는 자발적으로 이뤄지는 것으로 강제 사항이 아니다"라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도 기부는 자발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4일 "형편이 되는 만큼, 뜻이 있는 만큼 (기부에) 참여해주길 바란다"며 "기부는 선의의 자발적 선택이다. 강요할 수도 없고, 강요해서도 안될 일"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수면 아래서 나오는 정부 관계자의 발언을 보면 분위기가 다르다. "고소득자의 경우 받은 재난지원금에 돈을 더 얹어 기부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할 수 있다"거나 "공직자들과 기업이 기부에 적극 동참해주길 바란다"는 등의 발언은 기업들에게는 무언의 압박으로 들릴 수 있다는 것이다. 권력을 가진 정부와 총선에서 압승한 여당이 만든 규제·정책 환경에서 이윤 추구 활동을 해야 하는 기업 입장에서는 정부 눈치를 안 볼 수 없는 상황인 셈이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아무리 자발적인 기부라고 하지만 기업인들이 현장에서 체감하는 것은 다르다"며 "아마 대기업 상당수가 어떤 형태로, 얼마나 기부해야 하는지 내부 논의에 들어갔을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만성적인 경기 침체에 코로나 사태까지 겹치면서 경영난이 악화된 기업들은 여유자금이 넉넉하지 않다는 점이다.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유가증권시장에 상장된 685개 기업의 현금성 자산은 2018년 142조원에서 지난해 132조원으로 10조원 감소했다. 올해는 적자를 내는 기업이 늘어나는 등 실적이 악화돼 기업의 현금성 자산은 더 감소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코로나 사태의 영향이 본격화하는 2분기부터는 실적 악화가 가속화될 전망이다. 이에 기업들은 선제적으로 현금 확보에 나서고 있다. 강도 높은 구조조정에 나서는 기업들이 늘었고, 부동산 등 자산 매각 움직임도 활발하다.
그럼에도 사회 지도층, 고소득자 등에 대한 기부 여론이 형성되고 있어 기업이 이런 사회 분위기를 외면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말은 ‘자발적’이지만 실제로는 기업들이 기부에 대한 부담을 느낄 수 밖에 없는 셈이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현금을 확보하기 위해 전세버스도 매각할 정도로 위기의식이 심각하지만, 지금 분위기라면 기업들이 하나둘 울며 겨자 먹기로 기부 계획을 발표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또 다른 기업 관계자는 "코로나 사태에 따른 고통을 분담하고자 이미 성금을 모았지만, 그건 그거고 또 다시 기부라는 부담을 떠안게 됐다"라고 하소연했다.
특히 총수가 있는 기업들은 기부에 민감한 분위기다. 기부가 곧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총수의 이미지로 비춰지기 때문이다. 한 그룹 관계자는 "S그룹과 H그룹 등 기업 총수가 재판을 받고 있는 경우 상황을 더 예민하게 주시하지 않겠느냐"며 "기부가 재판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지만 이번 재난지원금 지급을 놓고 기부 운동이 확산되면서 기업이 기부를 통해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은 확실하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기업 관계자는 "이번 기부 운동은 방법만 다를 뿐 권력을 쥔 정권이 기업에 돈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측면에서 박근혜 정부 당시 자발적으로 모금했다고 한 K스포츠·미르재단 출연과 다를 게 없지 않으냐"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