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진 감독 "잘하는 것으로 가장 좋아하는 걸 찍고 싶었다"
게임 사용자가 만든 국내 첫 다큐… 게임 커뮤니티 화제

"일랜시아의 최대 강점? 없어요. 예전 명성? 절대 돌아갈 수 없어요. 특징? 재미없는 게 특징이에요." "저 일랜시아 좋아해요. 안 없어지면 좋겠어요. 일랜시아 없어지면 다른 게임 안 할 거예요." (게임 다큐멘터리 ‘내언니전지현과 나’의 한 대목)

넥슨이 1999년 출시한 다중접속역할수행게임(MMORPG) 일랜시아는 ‘버림받은 게임’이다. 높은 자유도와 미려한 그래픽으로 한땐 ‘바람의 나라’를 뛰어넘는 인기를 누렸지만, 이젠 낯선 이름일 뿐이다.

콘텐츠 업데이트는 2008년을 마지막으로 멈췄다. 단순 패치도 2014년 이후로 없다. 운영자가 떠난지는 10년이 넘었다. ‘무정부상태’가 지속되자, 일랜시아 속 세계에는 해킹과 매크로(자동 반복 행위)가 난무하는 무법천지가 됐다.

다큐멘터리 ‘내언니전지현과 나’의 한 장면. 박윤진 감독은 게임 안팎을 오가며 왜 일랜시아를 하는지 질문을 던진다.

‘디스토피아’처럼 보이는 일랜시아에 남아 있는 자들이 있다. ‘망겜(망한게임)’이라 자조하면서도 일랜시아 외 다른 게임을 하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이들이다.

오는 5월 인디다큐페스티벌 2020에서 상영된다는 소식이 알려진 지난주, 게임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된 다큐멘터리 ‘내언니전지현과 나’는 버려진 게임과 남겨진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기업·방송사가 아닌 유저가 제작한 게임 다큐는 국내 최초다. 상영시간이 70분에 이른다.

다큐를 만든 박윤진(27) 감독을 국내 언론으로는 처음 만났다. ‘내언니전지현’은 16년간 일랜시아를 즐겨온 박 감독의 게임 캐릭터명이다.

다큐는 ‘왜 일랜시아를 하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한다. 유저들은 "최근 나오는 게임보다 눈이 덜 아프다", "노트북에도 돌아가는 게임이 일랜시아 뿐"이라며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한다. 박 감독은 게임 속에서 만난 이들을 실제로 찾아 일랜시아에 남은 이유를 물었다.

인터뷰이들은 7살부터 일랜시아를 했다는 20대 여대생부터 아이를 키우는 유부남, 연예인 매니저까지 각양각색의 인생을 살고 있다. 감독은 이들의 삶을 추적하며, 일랜시아를 즐기는 이유가 단순한 ‘추억’ 때문만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다.

국내 최초 유저 제작 게임 다큐 ‘내언니전지현과 나’를 감독한 박윤진씨.

-국내 최초 유저 제작 게임 다큐다. 만들게 된 계기는.
"중앙대 영화학과를 졸업했다. 졸업작품이다. 다큐 제작 수업을 들으며 다큐에 관심이 생겼다. 잘하는 것(다큐)으로 가장 좋아하는 걸(게임) 찍어보자는 생각에 시작했다. 2018년 2월 첫 촬영을 시작해 2019년 12월 완성했다. 2년간 방학과 휴학 기간에 만들었다."

-MMORPG의 생명력은 사람과 사람간 관계에서 나온다. 일랜시아는 출시된지 20년이 넘었다. 현재 게이머는 얼마나 있나. 유저 나이대는.
"명확한 통계가 없다. 수백명정도라고 추측한다.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이 주류다. 40대 유저를 만나보고 싶었지만 찾지 못했다. 대부분 초등학교 때 일랜시아를 시작했다고 한다. 2030이 향수를 지닌 콘텐츠 같다. 길드(게임 내 모임)에 40명 정도가 있다. 친목 길드다. 길드 안에서 결혼한 커플도 있다.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기도 한다. 게임 속 친구들이 가장 편한 친구 같다는 생각도 든다. 초기 다큐 제작도 길드원 인터뷰로 시작했다."

-오래된 게임을 하는 이유는 추억과 사람 때문 아닌가.
"처음엔 추억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과거 살던 동네를 찾아가면, 과거 모습 그대로 남아있지 않다. 일랜시아 속 세계는 박제된 듯 그대로다. 향수를 채울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인터뷰를 이어가며 사람들이 단순히 추억 때문에 게임을 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 살던 동네를 찾더라도 그곳으로 이사하진 않는다. 게임이 그리워 돌아온 후 계속 남는 건 다른 충족감이 있다는 뜻이다."

-추억도 사람도 아니라면, 일랜시아를 하는 이유는.
"매크로와 자유도다. 일랜시아는 미용사부터 낚시꾼까지 수많은 직업을 가질 수 있는 게임이다. 최근 큰 인기를 끄는 샌드박스(모래상자)형 게임 '동물의 숲'처럼 특별한 목표가 없다. 매크로는 자유도를 극대화시켰다. 수백시간의 '노가다'를 거쳐야 할 일들을 매크로로 간단히 처리할 수 있다. 현실에선 불가능한 성장을 일랜시아에선 얼마든지 이룰 수 있다. 사회적 지위로 관계가 나뉘는 현실과 달리, 게임 속에선 친해지기도 쉽다. 모두 지금 2030에게 힘든 일이다. 결핍을 채워주는 것이다."

박윤진 감독은 다큐멘터리 ‘내언니전지현과 나’에서 유저를 찾아 ‘왜 게임을 하는지’를 묻는다.

게임사들은 매크로를 부정행위로 보고 제재한다. 게임을 자동화하는 ‘꼼수’라는 판단이다. 박 감독이 만난 이들은 매크로가 진정한 자유를 줬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현실에선 ‘금수저’를 보며 좌절감을 느낀다. 게임에서도 유료 아이템을 결제해야 강해질 수 있다. 그러나 운영자가 떠난 일랜시아에선 누구나 ‘꼼수’인 매크로를 쓸 수 있다. 오랜 무정부상태가 도리어 평등을 줬다는 해석이다.

-넥슨에 대한 애증이 공존하는 것 같다.
"나를 비롯해 많은 유저들이 넥슨에 애증을 갖고 있다. 게임을 방치한 넥슨이 싫지만 기업 입장에서 수익이 안 나는 게임에 투자할 수 없다는 점도 안다. 다큐를 찍으며 많은 유저들이 관리를 멈춘 게임사를 욕하면서도, 운영자가 돌아오는 걸 두려워하고 있다고 느꼈다. 매크로를 막아버릴까 무서워서다."

-넥슨도 고민이 많다고 한다. 담당 인력은 있지만, 섣불리 업데이트했다 남은 유저들도 떠날까 걱정하고 있다. 넥슨에게 바라는 점은.
"게임 서비스를 유지해줬으면 좋겠다. 또 비매너 유저에 대한 제재가 필요하다. 해킹으로 다른 유저들의 접속을 끊어 버리고, 아이템을 복사하고, 신규 게이머를 지독하게 괴롭히는 악성 유저가 많다. 불편하지 않게 게임할 수 있는 최소한의 관리라도 해줬으면 좋겠다. 일랜시아는 미완성 게임이다. 지금 와서 추가 콘텐츠 업데이트를 바라진 않지만, 한국보다 개발이 진척된 상태로 종료했던 일본 일랜시아의 콘텐츠라도 옮겨줬으면 한다."

-앞으로 계획은.
"게임에 관한 다큐를 더 찍어보고 싶다. 내언니전지현과 나를 찍으며 게임을 다룬 서적이나 영상이 부족해 고생했다. 해외 사례를 봐도 게임사나 방송사가 만든 다큐가 대부분이었다. 아직 구체적이진 않지만, 유저의 시각에서 게임을 바라보는 작품을 만들고자 한다."

내언니전지현과 나는 5월 홍대 롯데시네마에서 열리는 인디다큐페스티발2020에서 상영된다. 상영 시간은 5월 29일 낮 12시와 5월 31일 오후 3시로 예정돼 있다. 다만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 여파로 일정이 연기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