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전문가들 "어려워도 기본소득 퍼주기 지원은 안돼"

입력 2020.03.26 10:00

前 경제부총리, 주요 학회장, 연구원장 등 인터뷰
"채무비율 늘어나면 국가신용도 하락할 가능성
돈 찍어봤자 국내용…달러 쓰는 미국과 사정 달라"

전직 경제부총리와 주요 경제학회장, 연구원장 등 경제 전문가들은 현재의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재정 지출 확대가 필요하다는 점에는 동의하면서도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방안은 적절하지 않다고 입을 모았다. 4월 경기도가 1364만명 도민 모두에게 한 사람당 10만원어치 지역사랑상품권을 지급하는 것을 시작으로 ‘보편적 재난기본소득’ 관련 논의가 나오는 데 따른 의견이다.

경제고관들은 기본소득 지급이 한국의 통화 관련 상황과도 연관이 있다고 봤다. 기본소득은 달러화를 쓰는 미국과 엔화를 사용하는 일본처럼 ‘기축 통화권’에서는 효과적일지 몰라도, 우리나라에서는 효과가 크지 않고 후세대에 부담만 키운다는 것이다.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코로나19)로 인한 위기가 전대미문의 수준인만큼 어려운 곳을 집중 지원하는 게 더 효과적이라는 지적도 있었다.

조선비즈는 26일 유일호 전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권태신 한국경제연구원장, 이동근 현대경제연구원장, 장지상 산업연구원장, 김준경 전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KDI국제정책대학원 교수), 신성환 한국금융학회장(홍익대 경제학부 교수), 이인호 한국경제학회장(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등을 전화 또는 이메일로 인터뷰 했다. 이들에게 코로나19 위기 극복을 위해 필요한 재정 지출의 방향에 대해 물었다.

우한 코로나 여파로 자영업자들의 폐업이 속출하는 가운데 지난 18일 경기도 안산시의 한 중고물품상점에 폐업한 식당에서 나온 주방용품 등이 쌓여있다./조선DB
◇"재정은 경제위기 극복의 힘… 보편적 지원보다 ‘핀셋’ 지원 필요"

경제고관들은 코로나 사태가 전례 없는 위기인만큼 재정지출 확대가 불가피하다고 했다. 장지상 산업연구원장은 "실물 경제가 위축되는 위기인 만큼 금리 인하나 유동성 지원 등 통화금융정책만으로는 효과가 제한적이며 재정지출의 확대가 반드시 수반돼야 한다"면서 "재정 집행의 신속성, 충분성이 중요하게 고려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과거 경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힘인 든든한 재정이 흔들리는 것에 대한 우려감을 표시했다. 박근혜 정권 시절 경제부총리를 지낸 유일호 전 부총리는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발(發) 외환위기와 2008년 금융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버팀목은 든든한 재정이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걱정된다"고 말했다.

유 전 부총리는 "고령화가 빠른 우리나라는 재정 부담이 빠르게 늘어나는 것이 예정된 수순인데, 이렇게 예상치 못한 요인까지 튀어나오면 위험하다"면서 "이런 상황을 고려해 기본소득 등 보편적 지원보다는 직접적인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위한 ‘핀셋’ 지원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1997년 말 기준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은 14.5%였다. 올해는 최근 통과된 추가경정예산을 반영하면 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이 작년 말 기준 39.8%에서 올해는 41.2%로 1.4%P(포인트) 높아질 것으로 관측된다.

◇"기축 통화권 아닌데 돈 찍어내면 후세대 부담 가중"

권태신 한국경제연구원장도 "‘퍼주기’식 기본소득 지급은 빚만 늘리는 일로, 절대 피해야 할 일"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1998년 건국 이래 처음으로 달러표시 국채를 발행했는데, 당시 외국인이 우리나라의 회복 가능성을 믿은 근거는 건전한 재정이었고, 덕분에 차입 금리를 낮춰 달러를 조달할 수 있었다"면서 "채무비율이 계속 늘면 국가신용등급이 떨어질 수 있고, 이 때문에 외국에서 돈을 빌리기 어려워진다면 다시 외환위기가 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신성환 한국금융학회장도 "사람들이 소비를 못하는 이유는 돈이 없어서가 아니다"라면서 "기본소득은 지금 단계에서 필요한 처방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우리나라처럼 기축 통화권이 아닌 나라는 정부가 재정을 아무리 풀어도 ‘국내용’에 그치기 때문에, 경기 부양에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한국은 전세계 기축통화인 달러화를 쓰는 미국과는 사정이 좀 다르다는 것이다.

이인호 한국경제학회장은 "우리나라에서 통화 당국이 조치를 취하거나 재정을 풀어도 다 국내용"이라면서 "돈을 지나치게 찍어내 재정 신뢰도가 무너지면 원화로는 글로벌 상거래를 할 수 없게 되고, 장기적으로 무역을 할 때도 원화는 쓸모가 없어지는 효과가 발생한다"고 말했다.

이동근 현대경제연구원장도 "재난 기본소득 같은 것은 미국이나 일본같은 기축통화권에서 의미가 있는 것"이라면서 "그렇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재정으로 보편 복지를 하려고 하다가는 나중에 후세대가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래픽=송윤혜 디자이너
◇"금융시장 안정, 코로나 직격탄 맞은 곳이 지원 우선순위"

경제고관들은 정부가 재정 지출을 늘려 기본소득을 나눠주기보다는 코로나19로 인한 타격이 심한 곳에 집중 지원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또 과감한 금융 지원을 통해 금융 시장 안정을 도모하고, 금융 시장의 혼란이 실물 경제로 전이되지 않도록 해야한다고 했다.

권태신 원장은 "회사채 지급보증이나 신용보증에 재정으로 자본을 투입해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 신용보증기금 등의 BIS 비율을 맞춰야 한다"면서 금융시장 안정을 1순위 과제로 꼽았다. 신성환 학회장도 "실물경제의 위기로 인해 금융 시장의 유동성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데, 일단 금융 시장의 불을 꺼줘야 실물 경제에서 다시 2차 충격이 발생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코로나19로 소득이 줄어든 개인을 지원하기 위해서는 기업을 지원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이인호 학회장은 "소비 타격은 기업들이 어려워지면서 고용된 근로자들이 소득을 잃은 탓"이라면서 "결국 소비자 구제를 하려면 기업을 구제해야 한다"고 말했다. 권태신 원장도 "코로나19로 타격을 입은 여행사, 항공사, 서비스업 관련 기업 지원과 실업자들의 생계 보존 지원책이 필요하다"고 했다.

김준경 전 KDI 원장은 "정치인들이 무책임하게 대책을 던지고 있는데, 중앙 정부가 중심을 잡고 제한된 재정 자금을 어떻게 써야 할지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야 한다"면서 "해야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해 위기 관리 능력을 보여줘야 한다"고 했다.

장지상 원장은 "정부의 재정지출은 우선은 생산기능, 고용, 생활 유지를 통해 전염병의 확산에 대한 통제가 가시권 내에 들어온 이후 경제 활동 정상화를 목표로 해야 한다"면서 "사태 수습 후에는 서민의 주거복지 지원이나 혁신성장과 연계하는 등 재정지출의 생산성 증대 효과를 염두에 둔 전략적 재정지출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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