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수 칼럼] 나는 왜 트로트에 빠져들었나

입력 2020.03.04 07:00 | 수정 2020.03.04 10:19

김지수 문화전문기자
나훈아 공연에 갔을 때가 생각난다. 허리 굽은 할머니도 번쩍 일으켜 세운다는 후기는 빈말이 아니었다. 흰 러닝에 청바지를 갈아입고 나와 세트마다 무대를 찢어버리는 이 칠십 대 트로트 가수에겐 육적인 끼와 조르바 풍의 자유로움이 흘러넘쳤다. 눈은 애닯게 흘기면서 입은 찢어지도록 웃는 ‘폼’이 기름진 보디빌더처럼 관능적인데, 기타 하나로 단출하게 ‘옥경이’와 ‘무시로’를 넘나들 땐 객석에서 숨소리마저 멎었다.

안달복달 살지 말라고, 행여 수중에 돈이 남아있으면 자식들 주지 말고 공짜로 숨쉬게 해준 세상에 주고 가라고, 백발의 가수는 노래 중간에 타이르듯 호통을 쳤다. ‘자뻑'과는 달랐다. 삶이 노래가 되도록 오래 수련한 자의 긍지, 무엇보다 청중을 향해 ‘니 마음 내가 안다'는 위무의 의지가 깨끗하고 결연했다. 허리 굽었던 할머니가 일어나 춤추는 건 흥 때문만이 아니었다. 슬픔은 슬픔대로 받아주고 기쁨은 기쁨대로 말아주는 다정한 화법이 창법이 되니, 청년이나 노인이나 ‘살아있음'으로 한껏 고무됐다.

아버지는 면도하거나 구두를 닦을 때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흥얼거렸다. ‘꽃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형제 떠난 부산항엔 갈매기만 슬피 우네...’ 육형제 중 홀로 서울살이를 했던 당신의 정한이 노래에 실려 구슬펐다. 턱수염이 파랗게 젊었던 아버지는 가수가 꿈이었지만, ‘전국노래자랑' 한번 나가보지 못하고 팔순을 맞았다. 그래서일까.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울려 퍼지면, 그 쿵작거리는 반주가 뱃고동처럼 심장에 감겨 나는 사춘기 시절, 방구석을 나와 방어진 밤바다를 하릴없이 헤매다니곤 했다.

트로트를 듣거나 부를 때, 어른들의 눈동자는 반들거리며 온기가 돌았다. 손자들 재롱에 넋 놓을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서사의 두레박을 내려 자기감정을 길어 올릴 때, ‘곡절 많은 인생이지만, 그 시간을 살아낸 내가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그 표정. 할머니는 아가씨로, 할아버지는 총각으로 순식간에 플래시백 되고, 눈앞엔 여러 층위의 시공간이 어른거렸다. 소설가 김연수는 일본 치바현에서 태어난 어머니를 위해 칠순 잔치에 ‘블루라이트 요코하마’를 불렀다고 ‘청춘의 문장들'에 썼다. 어쩌면 트로트는 윗세대의 ‘청춘의 문장'일 지도 몰랐다.

그런데 윗세대의 ‘청춘의 문장'은 어떻게 젊은 세대까지 사로잡았을까?

트럼펫같은 음색을 가진 14살 소년 정동원. 정확한 가사 전달만으로도 감동이 밀려온다.
‘미스터트롯'이 시청률 30%를 넘어서서 국민 예능으로 발돋움했을 때, 나는 느꼈다. 뉴트로 열풍에 맞춘 역동적인 쇼의 포맷 덕도 있겠으나, 사람들이 그동안 얼마나 정확한 우리말로 된 노래를 듣고 싶어했는지. 후렴구와 사운드에 파편적으로 사용되던 한국말이, 기승전결을 갖춘 한 덩어리의 온전한 텍스트로 꽂힐 때 트로트는 개인에게 내장된 ‘공동체의 기억과 히스토리'까지 건드린다.

‘아야 뛰지 마라 배 꺼질라, 가슴 시린 보릿고개 길’로 이어지는 진성의 ‘보릿고개'는 가슴뼈를 눌러내는 13살 소년의 청아한 음성만으로도 절창이 된다. 외국어처럼 둥글기보다, 각이 진 채로 선명하게 요동치는 한글의 자음과 모음은, 슬픔과 기쁨을 담는 감정의 그릇으로 얼마나 출중한가.

임영웅이 당겨진 활시위 같은 몸으로 ‘행복했던 장미 인생, 비바람에 꺾이니, 너는 한 떨기 슬픈 민들레야' 비단 같은 어근과 조사를 뽑아낼 때, 정동원이 부동자세로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소원이 무엇이냐' 베틀에 무명 짜듯 가만히 자음을 밀어낼 때, 이찬원이 ‘울지마 울긴 왜 울어, 그까짓 것 사랑 때문에' 칼칼하게 내지르다 싹둑 잘라 눙을 칠 때, 영탁이 노동요 부르듯 ‘막걸리 한 잔'을 걸지게 권할 때… 나는 천둥 같고 봄버들 같은 목젖에서 흘러나오는 그 또렷한 명사와 동사, 부사와 형용사에 집중한다.

한 어절씩 입에 넣어 ‘꺾고, 찢고, 맛보고, 씹는' 트로트만의 발성과 창법이 우리말의 정확한 형태감에 이토록 잘 맞을 수가! 알다시피 트로트의 명칭은 서양의 춤 형식인 폭스트롯(foxtrot)에서 따온 말이다. 여우가 걷듯 4분의 4박자에 맞춰 사뿐사뿐 추는 리듬이 일본을 거쳐 들어와 트로트가 됐다는 게 정설이다. ‘엔카'의 아류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일본 내에서는 ‘엔카의 원류는 한국이며 특히 영남 쪽의 민요에 기원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언젠가 타악기 주자 김대환 선생의 상가에서 장사익이 부르는 ‘대전 부르스'를 들은 적이 있다. ‘잘 있거라 나는 간다 이 별의 말도 없이, 떠나가는 새벽 열차 대전발 0시 50분...' 상갓집이 잔칫집이 되고, 울음이 웃음으로 번지던 그 밤의 풍경은 소란스럽고도 따스했다. 소리꾼 이희문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사근사근하게 말을 보탰다.

"제가 하는 민요가 딱 그래요. 멜로디는 경쾌해도, 그 안의 텍스트는 절절하죠. 말을 어떻게 씹느냐에 따라 감정이 확확 달라져요. 입은 웃는 데 눈에서는 눈물이 나요." 이희문은 경기 민요 전수자 고주랑 여사의 아들이다. ‘기생오라비' 소리 들을까 말리던 아들은 지금 유튜브와 홍대 클럽에서 ‘베틀을 노세, 베틀을 노세' 떼창을 끌어내는 글로벌 명창이 됐다.

매회마다 끓는 주전자같은 격한 감정을 미세하게 자글거리는 기포로 공기중에 뿜어내는 임영웅. 트롯계의 람보르기니다.
그동안 트로트는 한국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생존했다. 바이올린 현처럼 깨끗하고 낭창한 ‘엘리지의 여왕' 이미자와 ‘비음의 여왕' 심수봉은 한국 현대사에서도 극적으로 등장했다. 금지곡의 풍파를 겪으면서도 여전히 그 음정과 발음이 흔들리지 않고 CD처럼 정확해 내 귀엔 클래식 음악 같다. 한때 남진과 나훈아의 라이벌 구도는 남한을 두 개의 취향으로 갈라놓을 만큼 위력적이었다. 1930년대 최초의 직업 가수이자 트로트 스타였던 채규엽은 알고보면 일본에서 유학한 바리톤 가수였다.

음악 산업에서 소외되면서 관광버스용 ‘위락 음악'이라는 조롱을 받으면서도 정통 트로트는 우리 삶 속에서 잡초처럼 꿋꿋이 살아남았다. 불의에 저항하거나 세계평화를 웅변하기보다 노골적인 개인의 언어로 눈물과 땀과 그늘을 위로하며.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어쩌면 한국인의 피는 고혈압이나 저혈압이나 저마다 쿵작쿵작, 쿵짜라 쿵짝, 트로트의 네 박자에 맞춰 흐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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